연주는 계속되고 문비의 두 눈에는 가볍고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잔잔하게 고여만 있던 이슬이 흰 뺨으로 굴러 떨어진 건 앙코르곡을 듣던 중이었다. 앙코르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테르예 이숭셋은 간단히 곡 소개를 했다.
“앙코르곡은 내가 만든 곡이 아닙니다. 내 소중한 친구의 친구로부터 간곡하게 부탁받은 곡입니다. 편곡은 내 친구가 했지만 작곡자는 따로 있다고 합니다. 물론 나는 원곡자의 이름을 들었습니다만, 밝히지는 않을 겁니다.”
테르예 이숭셋은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객석을 한 번 휘둘러보았다.
문비는 고개를 숙여 연주회 팸플릿을 들여다보았다. 곡 목록에 앙코르곡도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직 제목뿐이었다. 영어로 ‘The moonlight of a spring night’. 문비는 거의 소리 나지 않는 입속말로 말해 보았다. 봄밤의 달빛, 이라고.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풀대는 솜털씨앗 같고 단풍나무의 날개열매 같고 야생화 핀 들판 같은 선율. 동실동실 떠다니거나 핑그르르 맴을 돌며 나는가 싶게 경쾌하면서도 폭신하고 나긋나긋한 음조.
그 곡에 대해서라면 문비는 뭐든 다 알고 있었다. 원곡자와 작곡의 배경을. 그날의 하늘과 바람과 신록의 향기를, 곱고 따뜻한 마음들을, 기분 좋은 취기를, 알알하면서도 상쾌했던 심장의 두근거림을. 커다랗게 떠 있던 슈퍼문, 그러니까 봄밤의 달빛을.
그날 문비가 무의식중에 흥얼거렸던 자신만의 콧노래가 얼음 악기의 청아한 음에 실려 뮤직홀을 그득 채웠다.
눈물이 굴러 떨어지는 문비의 옆얼굴을 라한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지금은 그녀가 오롯이 홀로 자신의 음악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눈물을 닦아 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될 터였다.
생생하고 신기로운 감각이 문비의 내면으로 가랑비처럼 스며들었다.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무심결에 표출했던 허밍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다니. 그날의 풍경과 소리와 향과 촉감이 선율에 실려 고스란히 되살아나다니. 그동안에는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거나 상관없이 그것들을 보고 듣고 맡고 만질 수 있다니.
마음속 어떤 지점은 푸르고 무성하게 일어나고 어떤 지점은 순하고 연하게 가라앉았다.
모든 연주가 끝이 났다. 연주자들이 환호와 박수 속에 퇴장하고, 관객들도 줄줄이 빠져나가는데 문비는 아직도 몽몽한 눈빛을 허공에 둔 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라한은 그녀가 여운에서 빠져나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의 자리와 가까운 통로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송라한?”
“네가 어떻게 여기……”
놀란 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서슬에 문비가 고개를 돌려 통로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문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피어났다.
“은세씨.”
“문비씨. 와아, 진짜 사람 사는 일이 어쩜 이렇죠?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딱 마주치다니.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아, 너무 뜻밖이고 너무 좋아서 돋은 거예요.”
은세의 일행으로 보이는 금발의 유럽계 여자와 흑발의 아프리카계 여자가 먼저 나가 있겠다는 손짓을 하고는 입구를 향해 멀어졌다.
“우리도 일단은 여기서 나가자.”
라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은세가 라한을 제쳐두고 문비의 팔짱을 끼었다. 워낙 스스럼없고 자연스러운 태도인지라 문비가 어색해 할 틈조차 없었다.
“좋아 보여요. 두 사람.”
나란히 걸으면서 은세가 낮게 속삭였다.
“잘 지내는 거죠?”
멋쩍게 미소 지으면서 문비가 물었다. 은세는 활짝 웃어 보이면서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했다. 로비로 나가자 라한이 정색하고 은세를 응시했다.
“소식이 통 없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마음이 좀 놓인다.”
은세가 집안 어른들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먼 이국을 방랑하는 이유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문비뿐이었다. 은세와 문비가 비밀스러운 눈짓을 교환했다.
“셋이서 가볍게 한 잔 하자.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 아닌데.”
라한과 문비를 번갈아 보며 은세가 제안했다. 마치 이제는 다 극복했다는 듯 쾌활하게. 체념일지언정 한 톨 먼지만큼의 미련도 없다는 듯 산뜻하게.
“내일 다시 만나는 게 좋겠다. 점심 어때?”
저쪽에서 기다리는 은세의 일행을 일별한 라한이 은세의 팔을 가볍게 톡톡 다독였다.
“내일 점심? 그래, 그러자. 문비씨, 내일 봐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은세가 흔쾌히 수락했다. 그녀는 문비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고는 일행에게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일행과 합류한 은세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코트 깃을 여미며 돌아섰다.
“은세씨, 참 좋은 사람이에요. 언제 봐도 기운차고.”
은세의 뒷모습이 인파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있던 문비가 말했다.
“네. 좀 마른 것 같긴 한데 건강하고 밝아 보여서 안심이에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걷기 시작했다. 호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서 걸어서 가기에 무리가 없었다.
“라한씨가 한 거죠? 아까 그 앙코르곡.”
“벤야민 스승님께서 애써 주셨어요. 하지만 만약 곡이 좋지 않았다면, 스승님 마음에 들지 못했다면 어림없었어요. 다행히 스승님께서 곡을 무척 좋아해주셨죠. 곡의 배경에 대해 대강 말씀드렸더니 제목도 스승님께서 붙여 주셨어요. 그 제목, 문비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봄밤의 달빛. 마음에 들어요, 무척. 솔직히 말해서 편곡이 정말 훌륭했어요. 그래서 연주가 그렇게 빛났던 거예요.”
자신이 만든 곡이지만 문비의 평가는 꽤나 냉정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닌데, 원곡도 충분히 아름다워요.”
“무슨 말인지 알지만 원래의 곡은 단순한 편이고 더 정제해야 할 부분들이 있어요.”
“다음엔 스스로 그렇게 다듬어 보는 거 어때요? 음, 공부가 좀 필요하려나?”
최근 들어 문비가 자신의 안에서 솟아나오는 음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음을 라한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문비가 자신의 내부에서 샘솟는 곡조를 다시 길어 올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