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뻗으면 닿을 반경 안에

by 화진


추운 밤이었지만 따뜻한 불빛에 물든 그림 같은 거리를 걷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높고 검푸른 하늘에는 별이 있고 스쳐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설렘이 있었다.


어느새 찾아온 침묵을 당연한 듯 어루만지며 문비는 신중하게 걸었다. 최근 그녀는 발밑에 주의를 기울이며 걷는 일이 많아졌다. 어스름할 때나 밤일 때 특히 그랬고, 지금처럼 생각이 많을 때도 그랬다.


“춥지 않아요?”


문비의 걸음새를 그녀 몰래 유심히 보던 라한이 침묵을 깼다.


“괜찮아요. 걷기에 딱 좋은 것 같네요.”


추위가 이 순간을 완성한다고 문비는 생각했다. 음악이 남긴 아름다운 잔향과 이국적이고도 예스러운 거리의 정취를 추위가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나마 복잡하고 쓸쓸한 상념을 마음의 가장자리로 밀어 놓을 수 있었다.


“나, 믿어요?”


갑자기 걷기를 멈춘 라한이 문비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물었다.


“네?”


“다른 뜻은 없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나를 신뢰할 수 있는지 묻는 거예요.”


“그런 거라면…… 네, 믿어요.”


있는 그대로의 뜻이라 해도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지만 그의 낯빛이 진중해서 문비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럼, 달려요.”


라한이 문비의 손을 잡더니 앞으로 달려 나갔다. 문비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 달렸다. 달리기의 호흡이 제법 맞아 들어간다 싶었을 때 라한이 말했다. 속도를 늦추지도 않은 채.


“눈을 감아 봐요.”


“뭐라고요?”


문비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눈을, 감고, 달리라고요.”


목소리를 아까보다 높인 라한이 한 어절씩 딱 딱 끊어 분명하게 한 번 더 요구했다.


문비는 깜짝 놀라는 한편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가 자신을 신뢰하느냐고 물은 까닭이 이거였구나, 깨달았고.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요컨대 시각을 잃고 난 이후를 가정해볼 때 문비를 몹시 낙담하게 했던 것이 숨이 턱에 차도록 마음껏 달릴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절망과는 또 별개로.


아주 잠깐 눈을 감았던 문비는 이내 다시 떴다. 그리고 바라보았다.


느슨하지도 갑갑하지도 않은 적당한 악력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의 굳건한 손을. 반걸음 정도 앞서 달리며 길을 안내하는 그의 등과 목과 비스듬히 비껴 보이는 옆얼굴을. 그 얼굴에 서린 긴장을, 애수를, 강인한 의지를.


그래, 나는 순수하게 믿고 있어. 이 사람을.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서 흠칫 하는 느낌이 났고 그가 속도를 조금 줄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전력질주는 아니었지만 문비는 계속 달리는 중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다는 감각이 두 뺨을 쓰다듬었다. 차갑지만 상쾌했다.


라한이 손의 힘과 방향을 조절해 문비가 기우뚱거리거나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도왔다. 문비의 심장은 세차게 그리고 바삐 뛰고 호흡은 가빠 왔다. 두려움이 밀려난 자리에 서서히 쾌감이 흘러들었다.


시야를 차단하고도 달리기는 가능한 거였다. 잡아 주는 손이 있다면, 그 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면.


이만 쉬고 싶어진 문비가 손을 당겨 신호를 보냈다. 라한은 즉시 신호를 읽어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멈춰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몸을 숙여 한껏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두 사람은 호텔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방으로 돌아간 문비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유유자적 지나간 날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녀의 내면으로 몰아쳐 들어온 날이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단연 음악이었다. 얼음 악기가 내던 투명한 음, 자신이 만든 곡을 얼음 악기 연주로 들으면서 느꼈던 경이와 환희.


그는 나에게 곡을 만들어 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걸까? 작곡은 앞이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향한 수많은 의문과 회의가 부풀었다 꺼지고 부스러졌다 재건되기를 반복하는 동안 문비는 가물가물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문비는 늦잠을 잤다. 은세와의 점심 약속 시간이 조금 일러서 문비는 아침을 거른 채 호텔을 나섰다.

“눈을 감고 달려보라고 했던 거 말이에요. 왜 갑자기 그런 걸 시켰어요?”


문비의 질문에 라한은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해서요.”


“그랬군요. 솔직히 달리기 같은 건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나는 장차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 테니.


“연습하면 전력질주도 할 수 있어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 함께라면.


“모르겠어요. 달리고 싶다는 마음, 전력질주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을지.”


완전히 볼 수 없는 그날이 막상 닥쳤을 때 내가 적응할 수 있을지. 그때 가서도 포기하지 않고 해내고 싶다는 의지와 힘을 낼 수 있을지. 이런 생각을 하면 어쩔 수 없이 겁부터 나는데.


“내가 있을게요. 당신이 손 뻗으면 닿을 반경 안에. 언제나 그 안에 있을게요.”


담담하지만 확고한 그의 말에 담긴 깊은 의미를 문비는 알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답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녀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저만치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 앞에서 은세가 방방 뛰면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문비는 라한을 뒤로 하고 은세에게로 뛰어갔다. 은세가 문비의 손을 잡더니 라한에게 한쪽 눈을 찌긋하고 둘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집에 소식을 끊고 집에서는 너 경제적 지원을 끊고. 은성 누나한테 들으니 아버지께서 네 돈줄이란 돈줄은 다 막아 놓으셨다던데. 어떻게, 뭘 해서 먹고 살고 있는 거냐, 서은세?”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기가 무섭게 묻는 라한은 잔소리하는 오빠 같은 표정이었다.


“다 방법이 있지. 아, 물론 합법적이고 건전한 방법이니까 걱정 마시고.”


은세가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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