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웃음이 자유롭고 해맑아서 문비는 은세를 따라 연하게 웃었다. 그러나 라한은 웃지 않았다. 그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적당히 둘러대는 말과 눙치는 웃음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자신을 안심시키고 싶으면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을 하라고.
“표정 좀 풀어라. 뭘 그렇게 심각하니? 너 재미없는 애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만, 사랑이라는 걸 하면 사람이 좀 바뀌기도 하고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투덜거리던 은세가 문비를 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런 재미없는 녀석 구제해 줘서. 문비도 입모양으로 대답했다. 그게, 저도 실은 재미없는 축에 속하거든요.
문비는 은세가 일부러 더 밝고 스스럼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느꼈지만 가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마쯤은 문비가 그녀를 오롯이 라한의 가족으로만 보아 주기를 원해서일 테고. 또 얼마쯤은 비밀스러운 실연의 아픔을 실제로 조금씩 이겨내고 있기 때문일 거였다.
“알았어, 바른대로 고할게. 말해 준다고.”
여전히 굳은 얼굴로 주시하는 라한을 향해 은세는 자기가 졌다는 뜻으로 두 손을 진짜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일단 이야기의 시작점은 풀라 아레나에서 바라보는 일몰인데. 아, 송라한. 기억하지? 지난봄에 내가 풀라 아레나 간다고 했던 거.”
라한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 일몰이, 해지는 아드리아 해가 가슴 저리도록 예뻐서 그대로 바다로 걸어 들어갈 뻔, 한 건 아니고 눈물은 좀 나더라.”
농담처럼 말하는 은세는 천연덕스러웠지만 문비는 알 것 같았다. 저 말이 농담이 아닌 진실이라는 걸.
“그러다 밤이 오고 색색의 조명이 비치는 풀라 아레나에 유려한 첼로 선율이 가득 찼지. 청승맞게 또 눈물이 나더라고.”
“네가 그렇게 눈물이 흔한 줄은 몰랐는데? 혹시 너 그 무렵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그래서 갑자기 그렇게 훌쩍 떠난 거였어?”
라한은 은세가 우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은세는 어른들에게 꾸중을 듣거나 몸이 아프거나 억울한 일이 있거나 화가 나거나 하면 우는 게 아니라 표정 없이 입술만 꽉 다물었다.
그래서 라한은 은세가 언제 슬픈지 알 수 없었다가 마침내는 언제나 슬펐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은세가 덜 껄끄러워졌다.
“원래 그렇잖아.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감동적이거나 그러면 막 눈물 나고. 응? 그쵸?”
은세가 과장되게 하하 웃으며 문비에게 동의를 구했다. 문비는 은세의 눈물과 그 눈물의 근원을 라한에게만은 숨기고 싶은 마음을 이해했기에 적극 동조해 주었다.
“맞아요, 맞아요. 나도 그랬던 적 있어요.”
은세가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라한을 쳐다보자.
“그래, 알았다. 하던 얘기 계속 해.”
라한이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피식 웃었다.
“그때 누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거야. 돌아보니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셀린이었어. 어제 본 친구들 중에서 아프리카계 친구. 손수건을 건네줬어. 연주회 끝나고 대화를 해 보니 잘 통했지. 마침 그 친구도 자유 여행 중이었고 함께 다니게 됐고, 친해졌고, 얼마 뒤에는 그 친구의 사돈인 셈인 에이미 그러니까 어제 그 금발머리 친구도 소개 받았는데.”
에이미는 은세와 같은 프로 골퍼였고 유명 선수였기에 은세는 에이미를 사적으로 알게 되어 기뻤다. 그런데 마침 에이미의 캐디가 경미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에이미는 오래 호흡을 맞춰 온 캐디를 교체할 뜻이 없어서 임시 캐디를 찾는 중이었다.
“내가 하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에이미가 한 대회 같이 뛰어 보고 상성이 좋으면 자기 캐디 퇴원할 때까지 맡기겠다고 하는 거야. 난 당연히 오케이 했고. 결과는 아주 좋았어. 서로 잘 맞았고. 그래서 한 달 정도 에이미의 캐디를 했는데 그 사이에 에이미가 우승도 거머쥐었어.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무슨 뜻인데?”
“그 우승 대회의 마지막 홀 그린에 있던 깃발을 내가 가졌다는 뜻이지. 에이미 우승하고 그 깃발 딱 떼어내는데 와 기분 진짜 죽이더라.”
프로 골프 대회에서는 우승 선수가 결정되면 그 선수의 캐디가 마지막 홀의 그린 홀컵에 꽂혀 있던 깃발을 가져가는 관례가 있다.
“그리고 또 우승 상금의 십 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센티브가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는 뜻이야. 호쾌한 우리 에이미는 그날 클럽하우스에서 바로 인센티브를 지급해 주었고. 에이미 캐디가 복귀하고 나서는 일회성 임시 캐디 일이 소소하게 계속 들어오더라. 그렇게 살았어. 시간적으로 여유 생기면 여행도 다니고.”
“운이 좋았네. 나름 열심히 살기도 했고.”
완전히 안심이 된 라한이 은세의 정수리를 담백하게 쓱 쓰다듬었다. 떠나기 전에는 길게 길렀던 은세의 머리 모양이 지금은 쇼트커트로 변해 있었다. 은세가 피하면서 인상을 써 보이고는 손가락빗으로 짧은 머리를 빗었다.
“하여튼 노을에 물든 아드리아 해를 보면서, 풀라 아레나를 휘돌아 밤하늘로 밤바다로 울려 퍼지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세가 문비를 보며 말했다.
“저 아름다움이 이토록 사무치게 와 닿는 건 내가 아직 삶의 신비를 다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구나. 더 가보고 싶다는 뜻이구나. 하는 생각이요.”
문비는 코끝이 찡해 와서 두 손을 입과 코에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은세는 문비의 사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은세가 해준 말은 문비의 상처를 정확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은세씨는 진짜 멋진 사람이에요.”
감정을 추스른 문비가 은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은세도 그녀의 손을 잠시 가볍게 맞잡았다가 놓았다.
라한은 은세와 문비 사이의 은밀한 연대를 막연하게 직감하면서도 그 중심에 자신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