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앞으로 어쩔 작정인데? 계속 그렇게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떠돌 수는 없는 일이잖아.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탐구할 시간이 더 필요한 거냐? 내 의견이 궁금하지는 않겠지만, 또 너한테 중요하지도 않겠지만 나는 네 가족이고 가족이란 으레 그런 말들을 주고받는 법이니까 내 의견을…….”
듣고 있던 은세가 쿡쿡 웃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그래 맞아. 가족이란 서로 중요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의견을 굳이 들려주려고 애쓰는 존재지. 그게 바로 ‘잔소리’가 되는 거고. 어쨌든 네가 그렇게 서론을 정성 들여 깔았다는 게 재밌으니까 계속 말해 봐.”
진지하기만 했던 라한의 얼굴이 부드럽게 이완되면서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굳이 내 의견을 말하자면, 너한테 어울리는 건 대회 마지막 홀의 깃발을 풀어 챙기는 모습이 아니라 호쾌한 드라이버샷을 날리고 우승 재킷을 입고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야.”
자주는 아니지만 라한은 가끔씩 은세가 대회를 치르는 짧은 영상들을 찾아보곤 했었다. 영상 속 은세는 힘과 생기가 넘쳤고 더러는 장난을 치며 웃기도 했는데, 집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행동과 표정으로 반짝여서 보기 좋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남들이 들으면 웃겠다. 십 년차가 거의 다 되도록 한 번도 우승을 못해 봤는데 트로피가 어울린다니.”
기분 좋은 민망함에 은세가 헛웃음을 흘렸다.
“십 년차 넘어서 처음 우승하는 선수들도 있긴 있잖아. 결혼해서 아이 낳고 첫 우승한 골퍼도 있던데.”
“그 선배는 워낙 무관의 제왕이었다고 봐야 해. 우승 없었을 때도 손꼽히는 실력자였다고.”
“나는 너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한 집에 살았던 지난 시절에는 둘이 이렇게 친근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매일 보면서도 각기 데면데면 겉돌았고 꼭 필요할 때만 서너 마디의 말을 주고받는 게 고작이었다.
오늘에야 제대로 한 가족이 된 듯해서 라한의 마음은 자연스럽고 푸근했다.
그러나 같은 유대감 속에서도 은세의 마음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은세는 기쁘면서 서글펐다. 은세가 가슴 저미도록 원했던 건 이런 식의 친밀감은 아니었으니까. 은세는 라한과 문비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바야흐로 부서진 열망의 파편조차 깨끗이 버려야 할 때임을 자인했다.
은세는 마음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한때 그녀를 안으로부터 상처 입히던 찬란하고 애처로웠던 열정과 덧없는 희구와 그것들로 타들어간 수없는 검은 밤들에게. 담담하고 명확한 작별을.
“이런, 우리가 너무 우리 얘기만 했죠?”
조용히 창문 저쪽의 거리를 내다보고 있던 문비에게 은세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괜찮아요. 편하게 해요.”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인 문비가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다 했어요. 사실은 오늘이 지금까지 살면서 라한이 쟤랑 나랑 제일 길게 얘기하고, 무게 있는 얘기를 한 날이에요. 우리 되게 안 친했었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을 거야, 그렇죠? 쉽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니 둘 다 잘 견뎠다고 잘 지나와 줘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차분히 말한 문비가 잔을 들었다. 화이트와인이 투명한 잔 안에서 찰랑였다. 은세와 라한도 잔을 들어 셋이 잔을 부딪쳤다. 마시기 전에 은세가 덧붙였다.
“선택권 없이 맞닥뜨린 난감한 시절을 지나온 혹은 지나고 있을 모든 이를 위하여!.”
서늘하고 깔끔하게 목으로 넘어가는 화이트와인의 풍미를 음미하며 문비는 은세의 건배사를 속으로 곱씹었다. 되뇌고 있으려니 어쩐지 미풍 한 줄기가 불어와 등을 밀어주는 느낌이 드는 말이었다.
지금 문비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고 소중했다. 말하자면 우연히 건너오는 자잘한 격려 같은 것들.
“뭐? 오슬로에서 여기 올 때도 비행기였는데 갈 때도 비행기라고?”
해산물 요리를 먹다 말고 은세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게 떴다.
그 기세가 가히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에 필적할 만해서 라한과 문비는 영문 모를 주눅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마주친 눈에는 똑같이 ‘비행기가 왜? 뭐가 문제지?’라고 씌어 있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송네 피오르도 안 보고, 플롬 산악열차도 안 타고 비행기로 휙 오슬로로 돌아간다는 게 말이 되냐고.”
아, 그 얘기였구나. 문비와 라한이 동시에 날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런 저런 형편 상 이번에는 시간을 길게 낼 수가 없었어.”
라한이 말하고 문비가 끄덕임으로 거들었다. 은세는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아깝게 되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서야 납득했다는 얼굴로 다시 포크를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세 사람은 레스토랑 앞에서 갈라지기로 했다. 문비와 라한은 공항으로 가야 했고 은세는 친구들이 기다리는 기차역으로 가야 했다.
은세가 문비를 포옹하고는 그녀에게만 들리게 나직나직 속삭였다.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하죠?”
“기억해요.”
그날의 은세의 목소리가 문비의 귓전에 되살아났다. ‘알았으면 해서요. 문비씨가 뭘 가졌는지.’라던 말. ‘상처 주지 말아요. 상처 주면 내가 용서 안 해요.’라던 말.
“문비씨를 믿을게요. 내 믿음을 지켜 줘요, 꼭.”
문비는 묵묵히 은세를 안은 손으로 그녀의 곧은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다행히 은세는 말로 하는 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두 여자가 떨어지자 라한이 은세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아무 일 없어도 연락 주면 더 좋고.”
은세가 라한의 손을 잡고 장난처럼 악수했다.
“그 말을 외투처럼 우산처럼 잘 간직하고 다닐게. 고맙고.”
“어딜 가든 항상 조심하고, 잘 챙겨 먹고, 건강하고.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네가 웬만하면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오는 거지만.”
북해의 바람이 거리를 휘돌아 구름을 밀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