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의 타원형 창문 저 멀리 겨울 별자리 깜박이는 밤의 창공이 드리워 있다. 그 검푸르고 아련한 조망에 넋을 빼앗겼던 문비가 이윽고 시선을 돌린다.
그루잠에 든 라한을 잔잔히 바라보던 문비는 비스듬히 기운 그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주고 싶은 충동을 망설임 끝에 참는다. 그러다 깨워 버리느니 좀 자게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다. 대신 그의 얼굴을 욕심껏 눈에 담아 본다.
이마에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가지런한 눈썹, 부챗살처럼 감겨 있는 속눈썹, 기름하게 두드러진 콧날, 단정하게 다문 입술. 무방비하고 순연한 얼굴을 보며 문비는 그가 햇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북풍과 내기를 했던, 따뜻함으로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만들었던.
이번 여행에서 그는 문비에게 아무것도 강권하지 않았다. 서먹하게 굴지도 않았다. 언제나 적당한 간격 안에서 적절한 온도의 다정으로 문비를 배려하고 지켰다. 뻔한 조언이나 설교 대신 그는 유유하게 보여주고 들려주었다. 풍경을, 사람을, 일상의 소리를, 음악을.
문비는 문득 궁금해진다. 눈앞의 이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갈지.
이 얼굴에도 나이테 같은 주름이 하나 둘 늘어가겠지. 그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볼 수 없다. 그를 떠나든 그의 곁에 남든. 문비가 기억하는 그의 얼굴은 지금의 얼굴, 그게 아니라 해도 고작 지금보다 2,3년쯤 나이 먹은 얼굴일 것이다.
라한이 눈을 떴을 때는 문비가 귀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잠은 꽤 곤했고 그림처럼 고요했다. 애상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그림. 라한은 살짝 찌푸려진 그녀의 미간을 펴주고 싶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곱다시 자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미간의 얕은 굴곡은 아마도 잠들기 전의 착잡한 마음이 만든 인상일 터였다. 기실 그가 다독여 펴고 싶은 건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 나름으로는 열심이었지만 그녀에게 얼마나 가 닿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때때로 그는 불안했다.
만약 사람에게도 나무처럼 나이테가 있다면 라한의 불땀머리는 문비를 향해 나 있을 거였다. 나무들이 햇볕 넉넉한 남쪽으로 그러하듯이.
그는 그녀가 다른 모든 것과 무관하게 사랑 하나로 자신의 손을 잡기를 바랐다. 그가 애원해서도 아니고, 그가 헌신적이어서도 아니고. 오직 그를 원하기 때문이기를.
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오후의 한복판이었다.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라한의 낯빛이 설핏 흐려졌다.
“무슨 일이라도…….”
문비가 걱정스레 말꼬리를 흐렸다.
“할머니께서 지금 입원해 계신다고.”
어머니인 석란의 메시지와 큰누나 은휘의 메시지가 각각 들어와 있었다. 내용은 흡사했지만 전하는 어감은 매우 달랐다. 어머니의 메시지는 신중함과 염려의 톤이라면 은휘의 메시지는 의문과 원망의 톤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추측되었다. 할머니가 왜 편찮으신지.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병원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얘기는 나중에, 우리 서로 나눠야 할 얘기가 있잖아요, 그거 며칠 후에 만나서 하기로 해요.”
“그래요. 어서 가 봐요.”
피로 때문에 곧장 집에 가 쉬고 싶기도 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던 문비가 선뜻 받아들였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조심히 잘 들어가요. 당분간 집에서 지내는 거죠?”
“네, 연락 기다릴게요.”
라한은 몇 번이나 문비를 돌아보면서 빠르게 걸어 공항을 빠져나갔다.
병원에 도착해 할머니의 병실을 찾아간 라한은 복도에 서 있던 은휘와 마주쳤다.
“왔니?”
은휘는 온몸으로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할머니는 좀 어떠세요? 많이 편찮으신 건 아니죠?”
묻는 라한의 소매를 은휘가 잡아끌고는 병실 문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갔다.
“너, 네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제대로 알고 그런 거니?”
밑도 끝도 없는 은휘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다 책망에 가까웠다. 라한은 은휘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와 동의는 다른 문제였고, 이미 스노우베어는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은휘는 꽤 오래 전부터 스노우베어를 욕심내 왔다. 그 욕심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할머니였고, 할머니의 결정은 은휘가 스노우베어를 두고 고심하던 여러 구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은휘로서는 실망하고 화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네, 알아요.”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나 큰누나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은 오히려 은휘의 노여움을 더하면 더했지 덜어주지는 못할 터였다. 라한은 고개를 떨구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아무래도 할머니, 판단력이 흐려지신 게 아닌가 싶어. 네가 바로잡아. 네가 할머니께 말씀드려서 없던 일로 해. 그게 옳아. 알겠니?”
라한은 대답할 수 없었다. 묵묵히 서 있는 라한을 보며 은휘는 이마를 짚더니 기막히다는 듯 헛숨을 쉬었다.
“너, 지금, 못하겠다는 거네? 안 하겠다는 거네? 하, 이건 아니지. 어…… 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어?”
“할머니와 한 약속, 깰 수 없어요. 그렇게 하시려는 할머니 마음을 다는 아니지만 조금은 헤아릴 것도 같고…….”
은휘가 입술을 깨물면서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데 병실 문이 열리고 석란이 나왔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남매를 본 석란이 그늘진 얼굴로 심호흡을 하고는 다가왔다. 은휘가 석란을 향해 묵례하더니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 버렸다.
“왔구나. 할머니께서 너 오는지 나가 보라고 채근을 하셔서 나와 봤어.”
석란은 아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라한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죄송해요.”
할머니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어머니가 식구들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이 되었으리라는 건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난 괜찮아. 너도 가볍게 내린 결정이 아닐 거고, 네 할머니께서도 쉽게 용단하신 게 아니시겠지. 난 네 할머니를 믿거든. 너도 믿고.”
병실을 향해 나란히 걸으면서 석란은 라한에게 엷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연해서 오히려 쉬이 부서지지 않을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