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 보렴.”
병실 문 앞에서 석란이 말하며 자신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라한이 어머니를 돌아봤다. 같이 안 들어가시냐는 뜻이었다.
“커피 좀 사올게. 맛있는 에스프레소가 드시고 싶다는구나. 마침 옆 건물에 로스터리 카페가 있더라. 사실은 너하고 단 둘이서 따로 나누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 거겠지.”
석란은 복도를 걸어가고 라한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은휘하고 마주쳤지? 싫은 소리 들었지?”
비스듬히 세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창밖을 보던 소혜 여사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라한은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소혜 여사의 등에 받친 베개가 비뚤어지고 흐트러진 게 라한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베개를 가지런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느라 라한은 한 손으로 소혜 여사의 등을 안아 지탱해야 했는데, 그 등이 생각보다 가볍고 앙상해서 그는 적이 놀랐다.
손자의 팔에 등을 의지한 소혜 여사는 감개무량했다. 이 아이와 이렇게 스스럼없이 친밀한 스킨십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핏줄로 이어지지 않은 조손간이라는 사실이 전혀 의식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괜찮다. 노병이지 뭐겠니. 뼈나 혈관이나 장기들이나 이 정도로 오래 써 먹었으면 말썽이 안 생길 수가 없지.”
“큰누나로서는 섭섭하고 화나는 게 당연해요.”
다시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라한이 말했다.
은휘는 일찌감치 스노우베어나 씨오터 모두를 장차 자신이 경영하리라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은성과 은세는 워낙 집안 사업이니 뭐니 안중에도 없이 자기 편한 게 제일이었고, 라한은 새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자식인 데다 역시 집안 사업이나 재산에는 전연 무관심했으니까.
“할머니께 코 꿰기 전에는 저도 그리고 은성 누나와 은세도 나중에는 큰누나가 다 이끌어 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요.”
흐음, 하며 소혜 여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스노우베어를 없애지 않더라도 소혜 여사는 죽기 전에 사업 규모를 줄여 어느 정도는 사회에 환원할 작정이었다. 다만 그 형태가 스노우베어를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것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얼마 전에 은휘가 스노우베어 리모델링 기획서를 가져왔더구나. 과연 그 아이답게 아주 훌륭했지. 하지만 나는 바야흐로 때가 왔다는 예감이 들었단다. 스노우베어에 어떤 앞날이 기다리는지를 밝혀야 하는 때 말이다. 그래서 은휘한테 일렀지. 아깝지만 그 기획은 폐기라고. 스노우베어는 영원히 사라질 거라고.”
소혜 여사의 얼굴은 평온했다. 라한은 할머니의 결심이 흔들리지는 않았는지 여쭤 볼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그 다음날 바로 은휘를 제주도에 있는 씨오터CC로 발령 냈다.”
은휘는 할머니 뜻에 저항하는 의미로 미뤄 두었던 휴가를 몰아서 내고는 제주도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작 중요한 건.”
라한을 보는 소혜 여사의 눈길에 미안한 마음이 배어 있었다.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게 있었더구나. 나는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고도 현명해지지는 못한 게야. 어떻게 그 점을 깜빡할 수 있었을까. 아마 내 목적을 꼭 이루고 싶다는 욕심에 사리 분별력이 일부 가려졌던 모양이다.”
“뭐가 마음에 걸려서 그런 말씀을……?”
라한이 말을 맺기도 전에 소혜 여사가 무거운 마음을 털어 놓았다.
“네 처지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르다는 걸 미리 계산하지 못했구나. 솔직히 네가 내 친손자였더라면 얘기가 좀 달랐을 거다. 똑같이 스노우베어를 네 손에 맡겨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해도 네가 아범의 친아들이고 은휘의 친동생이었으면 반발의 양상은 분명 지금과는 달랐을 거야. 네가 서씨 자손이었다면, 스노우베어에 대한 내 결정은 반대하더라도 그 일을 떠맡은 너를 배척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을 거다.”
말인즉 라한이 재혼 가정의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녀라는 점 때문에 식구들의 반발 앞에 더욱 상처와 소외를 받을 수 있음을 간과했다는 뜻이었다. 정말이었다. 소혜 여사는 식구들의 반대는 예상했지만 원망이나 의심의 화살이 이토록 날카롭게 라한을 직격할 줄은 몰랐다.
“은성이나 은세 둘 중 한 아이가 은휘만큼 강단이 있었으면 널 이 고생을 안 시켰을 테데 말이다. 이제야 겨우 다 같이 한 가족다운 분위기가 나고 있었는데……. 너한테 미안하구나.”
“미안은 하셔도 돌이키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라한이 웃음과 함께 말해서 소혜 여사도 호탕하게 웃었다.
“다시 무를 일은 없지, 절대로.”
“할머니.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다 감내할 수 있어요. 할머니 뜻 잘 받들어서 사심 없이 스노우베어를 산으로 숲으로 되돌려 놓으면 아버지도 큰누나도 결국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시간은 제 편일 테니까요.”
라한의 용기와 자신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소혜 여사는 알 것 같았다. 사랑, 사랑이겠지. 일전에 네가 그토록 절박한 슬픔에 빠졌던 것도. 지금 네가 이처럼 담대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것도. 사랑 그 하나로 다 설명되는 일이지.
“그 아이를 만난 게로구나?”
“그 아이…… 이제 문비씨라고 안 부르시는 거예요?”
“물론이지. 손주며느리가 될 아이니까 앞으로는 편하게 부를 참이다.”
“그래, 만나서, 어떻게 되었니?”
그 아이 마음 돌리기 쉽지 않을 것 같던데? 소혜 여사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목을 매는 중이에요.”
“자신은 있고?”
“한 가지는요. 끝까지 계속 이 마음일 거라는 거, 그건 자신 있어요.”
“그거면 되었다. 시간은 네 편일 테니까.”
창으로 비쳐드는 부드러운 빛에 소혜 여사의 미소가 복숭아 색으로 물들었다. 창백하던 안색에 혈색이 도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그 빛은 서쪽 하늘로부터 흘러드는 석양이었다.
동지가 되어준 손자와 함께 저녁놀을 바라보며 소혜 여사는 기운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사람은 순간의 연속을 살아가는 존재고 순간순간을 충만하게 하는 건 대개 이런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이라는 걸. 멀리 보이는 저 파스텔 색조의 노을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