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꿈도 없는 달고 긴 잠을 자고 일어난 문비는 청소부터 시작했다. 자신의 방을 시작으로 온 집을 구석구석 닦아내고 나니 오전이 훌쩍 지나갔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허기가 느껴졌다.
냉동실에 채선 이모가 주신 김치찌개가 있었다. 한 번 먹을 분량으로 소분해 놓은 것 하나를 꺼내 냄비에 넣고 인덕션에 올렸다. 데운 즉석밥에 김치찌개뿐이었지만 맛있었다. 보편적인 그리움과 향수가 녹아 있는 김치찌개의 맛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미뢰를 자극했다.
문비는 간단한 설거지를 바로 해 버리고 엄마 방으로 갔다. 앨범들을 꺼내 오래된 순서대로 하나하나 펼쳐보았다. 엄마의 역사를 천천히 눈에 담으며 넘기다 보니 마침내 문비 자신이 등장했다.
갓난아기 시절 사진들을 지나 백일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 나왔다. 백일의 자그마한 가문비가 레이스와 프릴 장식이 들어간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하나는 접고 하나는 앞으로 뻗은 다리가 앙증맞았다. 그리고……!
작은 발에 신겨 있는 양말에 고정된 문비의 두 눈이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채 형형한 빛을 발했다.
아기 발에 비해 헐렁한, 그래서 발목 부분에 얇은 리본을 두른 연두색 양말은 뜨개실로 짠 것이었다. 문비가 암자에서 공양주 보살에게 건네받았던 생모의 유품 상자에 들어 있던, 뜨다 만 아기 옷의 그 뜨개실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과 똑같은 실로 보였다.
문비는 백일 사진을 앨범에서 꺼냈다. 손에 들고 유심히 살폈다. 그러고는 앨범을 넘겨 돌 사진을 찾아냈다. 막연했던 예상이 딱 맞아떨어졌다. 분홍 저고리와 녹색 치마를 입은 돌 사진 속 문비의 발에도 같은 양말이 신겨 있었다. 이제 양말은 아기 발에 꼭 맞았다.
백일 사진과 돌 사진을 양손에 들고 비교해 보았다. 같은 양말이 확실했다. 양말을 생모인 이설이 떴으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겉뜨기와 안뜨기를 섞은 단순한 패턴이었으나 실의 짜임이 가지런하지 않은 곳이 군데군데 있었으니까. 뜨다 만 원피스가 그러했듯이.
평화롭게 가라앉아 있던 심경에 잔물결이 일었다. 거칠거나 어두운 물결이 아니라 꽃잎이나 단풍잎이 수면에 떨어졌을 때 일 법한 은근한 물결이었다.
이 양말은 언젠 뜬 것일까? 원피스를 뜨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바라는 답이 있어 생겨난 의문이었다.
혹시 공양주 할머니나 스님이 알고 계실까?
문비는 핸드폰을 꺼내 암자의 공양주 보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어렵지 않게 연결되었으나 답은 얻지 못했다. 공양주 보살은 이설이 양말을 뜨는 건 못 봤다고 했다. 스님에게도 물어봐 주었으나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하기야 문비도 암자에 가 있어 봐서 알지만 공양주 보살이나 스님은 객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이들이었다. 게다가 이설은 이정인과 한 방에 기거했고 이설의 모든 수발을 정인이 그림자처럼 붙어서 들었으니 공양주 보살이나 스님이 그 방을 들여다 볼 일은 거의 없었을 테다.
전화를 끊은 문비는 한 손에는 사진 두 장을, 한 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 상념에 잠겼다. 생모가 이 연두색 양말을 언제 어떻게 떴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인데 답을 아는 두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났다. 문비는 깜짝 놀라 사진을 놓치고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택배 도착 알림이었다.
택배물을 가지러 나갔다 온 문비는 현관에서 상자를 개봉했다. 공양주 보살이 보낸, 이설의 유품들이었다. 점자책들과 뜨다 만 아기 원피스. 미완성품인 원피스를 꺼내 들고 다시 엄마 방으로 간 문비는 방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했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떨어뜨린 두 장의 사진 가운데 한 장이 뒤집혀 있었고 거기 흰 면에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엄마의 필체였다.
뜨다 멈춘 원피스를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 바꾸었다. 시간이 넉넉하다 해도 그 원피스를 완성하고 싶지는 않다고. 도중에 한 번 손상되었던 마음을 입히고 싶지 않다고.
손상된 적 없는 마음을 아기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비록 그 마음이 아주 작고 평범한 무엇밖에 될 수 없을지언정.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마음만 거기 모아서 주고 싶다고.
양말이라면 충분히 뜰 수 있겠다고 했다. 친하게 지냈던 복지관 조리사 할머니께서 가르쳐 주셨다고. 할머니가 일을 그만 두시고 나서는 떠 본 적이 없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고.
그 양말을 문비에게 신기고 백일 사진을 찍었다. 조금 크지만 예쁘게 어울린다. 양말의 감촉이 신기한지 자꾸 손을 내려 만지작거리던 문비, 그러다가 나를 바라보며 꺄르륵 웃던 백일의 문비. 우리의 문비.
문비는 백일 사진을 다시 보았다. 접은 다리 쪽의 발에 즉 양말에 한 손을 댄 채 아직 치아가 없는 분홍 잇몸을 드러내고 말갛게 웃고 있는 아기를.
엄마의 메모는 암시하고 있었다. 그 양말은 문비의 생모 이설이 세상을 등지려 했던 사건 이후에 뜬 것이라고. 그 작은 양말에 누구도 감히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될 애달픈 모정이 들어가 있다고.
혹시나 싶어 돌 사진 뒷면을 보니 역시 거기에도 엄마의 짧은 글이 있었다.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찬란하고 황홀했던 장면은 이 아이를 처음 가슴에 안던 그 장면이라고.
밭은 숨을 몰아쉬면서, 끊어질 듯 가늘고 여린 음성으로, 계속 읊조렸다. 죄지은 손으로 결백한 어린 생명의 얼굴을 더듬어 기억에 새겨 넣는 동안 비로소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문비가 다른 한 손으로 안고 있는 미완의 뜨개 원피스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문비의 가슴 속 무언가가 재를 헤치고 드러난 불씨처럼 다시 불그레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