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한 빛과 평화로운 침묵을 노크 소리가 가만하게 흔들었다. 커피를 사러 갔던 석란이 돌아온 것이다.
“그만 가 보거라. 아범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다.”
소혜 여사가 또 라한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에스프레소가 든 자그마한 종이컵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깊게 콧숨만 들이쉴 뿐이었다. 처음부터 마실 뜻은 없었던 듯싶었다. 병실 안에 초코 풍미 진한 에스프레소의 향이 모락모락 퍼져 나갔다.
“내가 이리 드러누워 버렸으니 대신 널 회유하고 설득하려 들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난처하고 거북해서 안 되겠다 싶다면 집에 안 들르고 산골 네 거처로 가도 된다. 아범한테는 내가 얘기하마.”
“집으로 갈게요. 저도 노력해 보려고요. 할머니를 대신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노력이오.”
라한의 태도는 시원스러웠다. 가족이니까. 서로 몇 번이든 대화하고 노력하는 게 가족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새아버지는 아직도 대하기 어렵고 친밀도도 낮았지만 둘이 직접 마주하는 걸 피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아범은 내가 좀 이상해졌다고 여기고 있어. 요컨대 합리적이고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번 결단은 몹시 파격적인 처사였다. 합리성이라는 기준을 적용한다면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예전의 소혜 여사였다면 절대로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으리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소혜 여사는 이전의 그녀가 아니었고, 최근 그녀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나고 즐겁다고 느끼는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그건 아닐 거예요.”
석란과 라한이 동시에 말했다. 소혜 여사는 빙긋이 웃었다. 저 모자가 명하의 아내로서, 의붓아들이지만 아들로서 명하를 감싸는 모습이 흐뭇했다. 소혜 여사는 자신이 일으킨 집안의 파란이 쉬이 가라앉지는 않더라도 끝내는 원만히 무마되리라는 희망을 보았다.
“이만 가 볼게요, 할머니.”
인사하는 라한에게 소혜 여사는 입모양과 주먹으로 파이팅을 빌어 주었다. 석란이 라한을 배웅하기 위해 복도로 따라 나왔다.
“이 문제 때문에 나와 그이 사이가 나빠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란다. 우린 이 일을 우리 사이의 화제로는 올리지 않기로 했단다. 그러니 넌 네 소신대로 하렴. 세 가지만 잊지 않으면 돼. 존중과 예의 그리고 진심.”
“네, 어머니. 명심할게요.”
석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라한이 대답했다. 아들의 굳건한 손을 석란이 맞잡고 따스하게 다독였다. 진즉에 성년이 된 아들이었지만 이제야말로 석란은 자신의 아이가 어른이 되었음이 실감되었다.
라한이 본가의 대문을 들어설 무렵에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겨울을 나느라 헐벗은 정원과 화단은 우련한 조명 아래에서도 고적했다. 몇 그루의 소나무와 은목서만이 푸른 잎을 드리운 채 정원을 호위하듯 당당했다.
상록수들의 풍성한 그림자 사이를 지나는 동안 라한은 어머니의 당부를 되새기면서 의지를 다졌다.
“서재에 계셔.”
현관문을 들어서는 라한을 은휘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장 서재로 향하는 라한을 은휘가 따라왔다. 명하는 책상에 앉아 서류 더미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라한을 보았다. 라한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왔니? 거기 앉거라.”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을 벗으며 명하가 말했다. 라한이 소파에 앉자 명하도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은휘야. 라한이와 둘이서 얘기하고 싶구나.”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은휘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라한에게 달갑지 않은 시선을 잠시 던지고는 마지못해 발길을 돌렸다.
“이번 일로 너도 적잖이 난감할 테지.”
은휘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명하가 서두를 열었다. 라한은 평정심을 지키면서 표정으로 수긍했다.
“너로서는 할머니께서 맡아 달라 부탁하시니 거절하기 힘들었을 게다.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다만, 그런 일이 있으면 선뜻 맡기 전에 먼저 네 어머니와 나에게 의논을 했어야지. 안 그러냐?”
“죄송합니다. 할머니께서 입단속을 시키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내 어머니는 그러고도 남을 분이시니까. 네 생각은 어떠냐? 좋은 일 해보겠다고 그 큰 사업체를 허공에 날려 버리는 것이 과연 능사일까?”
“저도 반대할 만큼 반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지금의 제 생각이라면, 할머니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무엇보다 원하고 계신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라한이 솔직하게 답했다. 명하의 관점에서 보자면 물색없이 순진한 대답이었다. 명하는 라한을 지긋하게 건너다보았다. 이 아이는 자신이 어떤 규모의 자산을 관리하게 될 것이며 그 어마어마한 가치를 어떤 식으로 잃게 되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기나 한 걸까?
명하의 뇌리에 은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 재산에 관심이 없으면서 그렇게 엄청난 일을 맡는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스노우베어는 공중분해 된다 치고, 할머니께서 그런 일을 아무런 보상 없이 맡기실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중간에 라한이 마음이 바뀌면요? 그럼 그냥 쟤 수중에 다 넘어가는 거라고요.’
잔뜩 화가 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은휘를 명하는 엄하게 나무랐었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의붓동생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의심하는 거 아니라고. 그런 얘기는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말라고.
“선업을 쌓고 싶으신 거야, 네 할머니는. 하지만 꼭 그런 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너, 스노우베어의 자산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니?”
아무래도 잘 모르는 듯한 라한을 보며 명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자산을 고스란히 버리고, 시설 철거 비용에 오염 제거 비용에다 묘목 심고 풀씨 뿌리는 비용을 퍼부어 가면서 자연으로 되돌린다니……. 그게 또 몇 년 만에 뚝딱 되는 일도 아니고. 그러니까 내 말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선업을 쌓고자 한다면 보다 더 유의미하고 즉효성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