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설에 묻혀 있는 복수초처럼

by 화진


보탤 말이 없어서 라한은 잠자코 듣기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속으로는 할머니가 산골짜기 자신의 집까지 찾아와 다래를 준 소년 이야기를 하던 날을 곱새기면서. 그날은 라한에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 날로 기억되어 있다. 물론 다래와 소년 이야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그 기억을 간직하는 방식과 그 기억이 할머니에게 미친 영향. 그것들이야말로 할머니 아니 김소혜라는 한 사람의 심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열쇠였다. 그 모습이 소혜 여사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라한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할머니를 좋아하고 더 존경하게 되었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소혜 여사 또한 라한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라한이 문비를 찾기 위해 소혜 여사의 조건을 선뜻 받아들이던 태도가 마치 알기 쉬운 지도처럼 소혜 여사를 라한의 마음자리 깊은 곳으로 인도했을 테니까.


자주는 아니겠지만 그럴 때가 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 단 한 장면이면 족할 때가.


“스노우베어를 없앨 것이 아니라 매년 수익금의 일정 액수를 떼어 기부를 하거나 사회사업을 하는 방법도 있고…….”


서재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명하가 잠시 말을 끊었다.


은휘가 찻잔을 받친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사실은 서재 안의 기류가 어떤지 궁금하여 차를 핑계 삼은 것이었다.


“네가 할머니께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상기시켜 드렸으면 한다.”


찻잔을 들면서 명하가 말했다. 라한도 찻잔에 손을 뻗었다. 라한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듣고 싶었던 은휘는 쟁반을 든 채 미적거렸다. 명하가 그만 나가 보라는 뜻으로 부드럽게 눈짓할 때까지.


라한은 천천히 차를 몇 모금 마셨다. 쌉싸래한 풋내를 닮은 향과 함께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한결 긴장이 풀리고 심신이 이완되었다.


“상기시켜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할머니도 다 알고 계실 텐데요, 라는 말을 라한은 삼켜 버렸다.


“제 의견을 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기탄없이 얘기해라. 들어 보자.”


“제가 보기에는, 할머니께서는 당신께서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일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큰 자산이 사라지겠지만 또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입니다.”


“스노우베어를 만든 건 어머니시지만 이만큼 키워온 건 나와 은휘다. 이러실 수는 없어. 이건 아니다. 그래서 말이다만.”


정색을 한 명하가 라한을 응시했다.


“할머니께 말씀드려서 일단 네가 이 일에서 손을 떼는 게 순서일 듯싶구나. 어차피 네 적성에 맞는 일도 아니잖니.”


라한이 손을 떼면 소혜 여사의 가탈스러운 성격상 새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내세우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명하와 은휘로서는 급한 대로 시간은 벌 수 있는 것이다.


“저는 할머니께서 손 떼라고 하시면 즉시 손 떼고, 계속 맡으라고 하시면 계속 맡을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명하의 낯빛이 어둡게 여울졌다.


“바이올린 제작은 어쩌고?”


“계속할 겁니다.”


“병행하기 쉽지 않을 텐데?”


“할머니께서 병행할 수 있도록 조처해주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서늘하게 굳어가던 명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네가 손을 떼면 이렇게 불편한 대화를 할 필요도 없고, 어머니께서도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만큼 지금처럼 강하게 밀어붙이시지는 못하실 거다. 우선 그렇게 발등의 불이라도 꺼야지. 부탁이다. 그렇게 일단락 짓는 것으로 하자꾸나.”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슴속에 억눌러 둔 채 명하가 말했다. 라한이 친자식이었다면 이미 언성이라도 높였을 거였다. 그러나 라한은 서로 살갑게 지내지 못한 사이 훌쩍 성년이 되어 버린 의붓자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명하는 라한을 대할 때면 감정 표현을 정제하게 되곤 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들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할머니께 단단히 약속을 드렸습니다. 할머니 의사가 아닌 이상은 발을 빼지 않겠다고.”


“의외로구나. 네가 이렇게 어머니와 가까웠다니.”


아니면 발목 잡힐 까닭이라도 있는 걸까? 명하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라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손하고 차분하면서 결연했다. 이렇게까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안 보일 정도로 확고부동일 줄을 명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끝내고 말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좋은 일인지 좀 더 고심해 보도록 해. 오늘은 이만 가서 쉬어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누르며 일어난 명하가 다시 서류가 쌓인 책상으로 갔다.


“참, 베르겐에서 우연히 은세와 마주쳤습니다.”


문을 향해 몇 걸음 가던 라한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명하 쪽으로 돌아섰다.


“그래? 그 괘씸한 녀석, 몰골이 어떻든?”


한심해 죽겠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명하는 은세의 안부를 궁금해 했다.


“건강해 보였습니다. 알음알음으로 소개를 받아서 유명 선수들 임시 캐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답니다.”


“임시 캐디? 허, 얼빠진 놈.”


명하는 서류를 집어 들었고, 라한은 서재를 나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한은 은휘와 다시 마주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려는 차에 문자메시지가 왔다. 라한의 기색이 봄밤에 목련 피듯 밝아졌다.


내일 만날 수 있어요? 나, 당신에게 들려줄 아주 긴 얘기가 있어요.


당신이 그랬죠.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고. 비에 젖거나 발이 얼거나, 무언가에 꺾이거나 돌서덜에 나동그라지거나 하는 때.


그런 때에 우리를 일으키는 건 아주 작은 것이라고. 그걸 발견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그건 밤의 끝에 오는 아침처럼, 잔설에 묻혀 있는 복수초처럼, 언제나 우리 주위에서 우리가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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