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작정 화를 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세 분에게.”
긴 이야기의 말미에 문비가 덧붙였다.
그녀는 방금 라한에게 자신의 출생에 얽힌 곡절과 최근 1년 동안 삶을 뒤흔들어 놓은 일련의 사건이랄지 상황들을 차분히 풀어놓은 참이었다. 가족 아닌 타인에게는 처음 언급하는 거였다. 아직 세진에게도 인우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찻잔을 감싸 쥔 문비의 손을 라한의 손이 살포시 덮는 듯 잡았다. 그는 문비가 자신을 이 사연의 첫 청자로 선택해 준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기뻤다. 상처를, 통점을 어떤 포장도 가공도 없이 날것 그대로 들춰 보인다는 건 깊고 두터운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문비가 말하는 동안 라한은 진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듣는 내내 그의 얼굴은 봄의 강 같고 여름의 초원 같았다. 가을의 바다 같고 겨울의 장작불 같았다. 그러니까 무엇을 던지든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품어 다독일 수 있는 얼굴이랄까.
잠깐의 정적을 틈타 골똘한 표정을 짓던 라한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거, 아마도 화내는 게 미워하는 것보다 쉬워서일 거예요. 예전에 나도 그랬거든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친부 송유건의 죽음에 대한 주위의 의견은 분분했다.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사람들이 있었고, 사고일 뿐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라한의 어머니 석란은 단연코 후자 쪽이었다.
그러나 라한의 마음은 흔들리고 깨졌다. 그는 어렸고,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화내고 치고받고 하지 않았다면 내부의 불길에 마음과 삶이 고스란히 타 버렸을지도 몰랐다.
문비의 눈꼬리가 웃는 듯 서글픈 듯 모호하게 휘었다. 그의 말이 맞는 듯했다. 돌이켜 보면 미워하는 척은 할 수 있었어도 뼛속까지 미워할 수는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나 자신을 괴롭혔어요. 떼쓰고 억지 부리는 아이처럼 그랬어요. 봐라. 당신들 때문에 나는 이렇게나 힘들다. 너무 힘들어서 내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런 심정으로.”
문비의 말에 라한은 암자에서의 아슬아슬한 기억이 떠올랐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던 날이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망연한 눈으로 응시하던 그녀를 보고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이 와들와들 떨렸던 적이 있었다.
라한은 표나지 않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은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아버지의 마지막이 어떠했든 그것과 별개로 우리 가족이 행복했던 날들의 기억, 아버지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 그건 그것대로 명백한 진실이라고.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못하고 지나간 시간은 거스르지 못하지만 현재의 나는 선택할 수 있다고. 계속 화내고 원망할지, 포용하고 사랑할지.”
쉽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기까지 시간에게 그리고 좋은 사람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리라는 건 어렴풋이 깨우치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받았던 친절과 배려와 환대는 그것이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그를 미세하게 덥혀 주고 밝혀 주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로서는 지금 당장 손바닥 뒤집듯 화를 사랑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믿어 볼래요. 선택할 수 있는 날. 그리워하기로, 사랑하기로.”
온화한 낯빛으로 듣고 있던 라한이 느리게 머리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의 깊고 선한 눈매를 그윽하게 들여다보던 문비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입을 뗐다.
“엄마가 당신을 봤으면 굉장히 좋아하셨을 거예요.”
침착하게 눌러 두었던 라한의 마음이 이 한 마디에 둥실 부풀었다.
“우리가 꺾였을 때 우리를 일으키는 작은 것을 발견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당신의 그 말 있잖아요. 엄마도 비슷한 말을 하곤 했거든요. 언제 어느 때든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인간 세상의 나쁜 일들은 다 상상력이 없거나 부족한 인간들이 초래하는 거라고. 그러니 둘이 만났으면 아주 죽이 척척 맞았을 거야.”
왠지 크게 칭찬받은 기분이 들어 라한은 자꾸 얼굴 근육이 간질거렸다. 그는 괜스레 이마를 문지르며 웃음을 참았다.
“대놓고 좋아해도 돼요. 그러라고 한 말이니까.”
문비가 놀리듯 말하는 바람에 라한은 조금 쑥스러워하다 그녀의 말대로 활짝 웃어 버렸다.
“어머니가 나 보면 좋아하셨을 거라는 그 말, 나 좋을 대로 확대 해석해도 돼요?”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라한의 얼굴에 진지한 긴장이 서렸다.
우리, 헤어지지 않는 거라고. 당신이 손 뻗으면 언제든 닿을 반경 안에 내 자리를 허락하는 거라고. 그렇게 나란히 늙어갈 수 있다는 말이라고.
“나는…… 복잡한 가족사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그리고 길게 잡아도 몇 년이면 실명할 거예요. 이런 내가…….”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눈이 젖어 와서 문비는 당황스러웠다. 시선을 위로 쳐들고 숨을 삼켰다.
“괜찮아요. 그런 거 다 난 아무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니까.”
다급하게 문비의 손목을 잡는 라한의 손길은 단호하면서 따스했다.
“이런 내가, 이기적이게도 당신 옆에 오직 한 여자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 욕심, 접으려고 했는데, 접지 못했어요.”
손목을 놓고 미끄러져 내려온 라한의 손이 문비의 손가락을 살짝 그러쥐었다. 문비가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정말, 정말 괜찮아요? 이런 내가?
붉어진 눈시울로 문비가 라한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렁그렁한 두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라한이 속삭였다.
“두 사람이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건, 사랑 하나잖아요.”
같은 빛깔로 이어진 사랑.
“나는 당신에게 헌신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저 당신을, 당신의 사랑을 갖고 싶은 것뿐이야. 가문비,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그 빛깔로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잖아요.
“……사랑해요.”
툭 흘러내린 눈물이 뺨에 아롱져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