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노래

by 화진


거실 창가에 둔 운목이의 푸른 잎을 물 묻힌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문비는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자신보다 먼저 엄마 곁으로 온 행운목, 자신을 낳아준 생모가 안고 왔다는 행운목, 그녀들이 없는 세상에서 묵묵히 문비의 곁을 지키는 행운목.


문비는 나무의 줄기를 가만히 손으로 쥐어 본다. 오래 전 생모 이설의 손이 닿았을 줄기와 잎. 엄마가 애지중지 돌보던 나무. 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행운목이 이제 문비의 특별한 나무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무는 늘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이날까지 문비의 온 인생이 이 행운목의 생과 나란히 존재했던 셈이다. 마치 형제자매처럼.


문비가 눈을 창 너머로 돌린 것은 어떤 예감 때문이었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이 거기 있으리라는 예감. 이를테면 유리창에 나부끼는 눈꽃바람 같은 것. 아니나 다를까 하늘거리는 흰 점들이 검푸른 어스름 속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우와, 눈이 오네. 너도 봐봐. 어쩌면 이번 겨울의 마지막 눈일지도 몰라.”


운목이의 잎을 사람의 손처럼 잡아 작게 흔들면서 문비가 쑥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비가 운목이에게 난생 처음 말을 건네는 순간이었다. 문비는 화분에 기대어 두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렇게 나무와 사람이 함께 한참 동안 내리는 눈을 구경했다.


어느 결엔가 문비의 발이 까닥까닥 박자를 맞추듯 움직였다. 느리지만 가벼운 움직임을 따라 나직나직한 허밍이 흘러나왔다. 문비가 사뿐 일어나더니 기쁨의 악수를 나누는 것처럼 운목이의 한 잎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 칼림바를 가지고 나온 문비는 라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자 문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칼림바를 튕기기 시작했다. 라한은 잠자코 들어 주었다. 짧은 연주가 끝나고 문비가 말했다.


“노래가 돌아왔어요. 내 안의 노래가.”


전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재능이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노래를, 곡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새로이 꿈꿀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림과 노래는 분명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같았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노래일 수 있고, 노래는 소리로 그리는 그림일 수 있다고 문비는 생각했다.


“노래를 되찾은 거, 축하해요. 한 번 더 들려줄래요? 녹음해서 악보로 옮겨 볼 테니.”


라한을 위해 문비는 기꺼이 한 번 더 칼림바를 연주했다. 느릿하고 경쾌하게 흐르던 음들이 부드러운 곡선처럼 하강하다 마침내 아스라이 끝을 맺었다. 라한이 물었다.


“혹시 거기, 눈이 오나요? 듣고 있으니까 눈 내리는 장면이 떠올라서.”


“맞아요. 눈이 낙화처럼 난분분, 느긋하게 솔솔. 거긴요?”


“여기도 눈 내리는 밤이에요. 그런데 느긋하게 솔솔이 아니고 조급하게 펄펄.”


문비가 깨드득 웃었다. 명랑한 웃음소리가 라한에게로 가 닿아 기쁨의 미소가 되었다. 라한은 문비가 다시 맑게 웃게 된 게 가슴이 아플 정도로 좋았다.


“깨금이가 보고 싶다고 전해 달래요.”


“나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요.”


“설기가 그립다고 전해 달래요.”


“나도 많이 그리워한다고 전해요.”


“곧 봐요.”


“네, 곧.”


문비는 정월 대보름을 라한이 있는 산골 마을에서 맞을 예정이었다. 은성의 제안으로 제법 떠들썩한 달맞이 모임이 계획되어 있었다.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간 문비가 침대맡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미완성의 아기용 뜨개 원피스와 문비가 백일과 돌 때 신었던 뜨개 양말, 문비의 유치가 든 작은 두루주머니, 유아 시절 문비가 애착했던 수건 등이 든 상자였다.


뜨개 양말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엄마의 옷장 서랍 중에 문비의 어릴 적 물건들 중 의미 있는 것들을 모아 보관하는 칸이 있었다. 그 칸의 맨 안쪽에 유치와 애착 수건과 양말이 보관되어 있었다. 양말은 내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문비가 주의 깊게 보거나 찾지 않았을 뿐.


요 며칠 문비는 자기 전에 이 상자를 열어 보곤 했다. 추억과 흔적과 사랑이 깃든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늑해져 잠이 잘 왔다. 잠시 후 문비는 상자를 닫아 옷장 안에 넣었다. 이제는 매일 밤 꺼내어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산머리 위로 커다란 금화 같은 보름달이 자태를 드러냈다. 달빛을 받은 눈밭이 하얗게 빛나고 하늘도 연푸르게 밝아졌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와아! 대보름달이다!’ 혹은 ‘소원 빌어! 소원!’ 하고 소리쳤다. 저마다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하나 둘 눈을 뜨자 몇몇이 미리 준비한 폭죽을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제각각 한 개 혹은 두 개씩 든 폭죽에서 작지만 화려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반짝이는 빛을 꽃처럼 피우는 폭죽을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쥐불놀이를 대신하는 불꽃놀이였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덮여 설원처럼 변한 이곳은 본디 한실댁네 배추밭이었다. 모인 사람은 모두 열 명. 산골 마을 세 할머니와, 은성, 라한, 문비, 세진, 인우 그리고 안톤과 요한나까지. 안톤과 요한나의 방문은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것이었으나 이렇게 때가 딱 맞아떨어졌다.


안톤은 요한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와 보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고, 요한나는 안톤이 먼저 오자고 했다고 주장했다. 누구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고 중요하지 도 않았다. 중요한 건 함께여서 더욱 즐겁다는 거였다.


열일곱 살 소녀 요한나가 서툰 한국말을 할 때마다 세 할머니는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세 할머니가 앞다투어 맛있는 것을 요한나의 입에 넣어주려고 할 때는 요한나가 행복에 겨운 난처함을 즐기며 연신 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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