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그물

by 화진


조촐하지만 흥겹고 찬연했던 불꽃놀이의 끝 무렵에는 달밤의 눈싸움이 벌어졌다.


세진이 눈을 한 움큼 집어 인우의 뒷목에 슬쩍 집어넣은 것이 발단이었다. 인우가 똑같이 갚아주겠다고 눈을 뭉치자 세진은 달아났다. 인우는 달리는 세진을 겨냥해 눈뭉치를 던졌는데 세진이 문비를 방패삼는 바람에 눈뭉치는 문비의 허벅지를 맞혔다.


문비는 곧바로 눈을 뭉쳐 응전에 나섰는데 그건 또 하필 라한의 팔로 날아갔다. 라한의 옆에 있던 요한나가 망설임 없이 참전했고 이내 모든 사람들이 눈뭉치를 들고 서로 쫓고 쫓기는 양상으로 발전해 버렸던 것이다. 세 할머니들까지 예외 없이.


새하얗게 펼쳐진 눈밭에 엄살 부리는 비명과 목표 삼은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는 목소리와 웃음소리와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낭자했다. 허공에 흩어지는 눈가루와 무질서하게 날아다니는 눈뭉치와 잠시 동심의 세계로 뛰어든 사람들을 휘영청한 보름달이 청아하게 굽어보았다.


그렇게 왁자하게 뛰어 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눈 위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은 찬데 기분은 좋았다. 모두의 뺨이 붉었고 누구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자자, 뛰어다녀서 오른 열기가 식기 전에 내려들 가자꾸나.”


한실댁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젊은이들을 향해 말했다.


“옳은 말이야. 까딱하다 땀 식으면 감기 들기 쉽지.”


흰돌댁도 거들었다.


“이 늙은이는 잘 시간을 넘겨 놀았더니 올밤 벌어지듯 쩍쩍 하품이 나오는구나.”


내앞댁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길게 하품을 했다.


젊은이들이 일제히 네 하고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켜 엉덩이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냈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데도 달빛 하나로 충분했다. 도로로 내려서자 세 무리로 나뉘어져 서로 인사하고 손 흔들며 갈 길을 재촉했다. 세 할머니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라한 일행은 왼쪽 길, 문비 일행은 오른쪽 길로 각각 갈라졌다.


“아아, 이번 달맞이, 소박하고 수수했는데 오히려 너무나 재밌고 좋았어. 현민씨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셋이 나란히 걷다 세진이 아쉬움을 표했다. 현민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


“동감이야. 이런 게 힐링이지. 그건 그렇고 야, 한세발. 너의 그 동그란 코끝에서 반짝이는 그것 좀 닦지? 콧물 말이야.”


인우가 혀를 끌끌 차면서 놀렸다.


“콧물? 어쩌나? 내가 마침 손수건도 휴지도 없네? 이것 좀 빌릴게.”


세진이 인우의 소매를 낚아채 얼굴로 가져가려 하자 인우가 질색하며 뿌리치고는 뛰어 도망쳤다.


“콧물은 무슨. 보송하기만 하구만.”


손등으로 코를 쓱 훔치더니 세진이 코웃음을 쳤다.


“으이그, 귀여운 녀석들.”


문비가 세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득거렸다. 저만치 앞서 간 인우는 벌써 별장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셋이 간단하게 한 잔 하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비가 제안했다. 문비는 두 친구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할 작정이었다. 술의 힘을 빌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는 자신이나 듣는 친구들이 너무 무겁거나 어둡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술이 있는 풍경을 빌리려는 것이었다.


“내가 이번에 기막힌 소맥을 조제하는 비법을 전수받았잖냐. 아그들아, 마음의 준비를 하거라. 너희가 오늘 소맥의 신세계를 보게 되리니.”


의기양양하게 외친 인우가 냉장고 앞으로 갔다.


“어허. 오늘은 하이볼로 가라는 주신 바쿠스의 계시를 너는 받지 못하였단 말이냐? 오늘은 이 한하이볼이 말아주는 하이볼이니라.”


세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인우를 옆으로 밀치더니 검지를 들어 까닥까닥 흔들었다. 눈싸움하듯 대치하던 두 사람이 문비를 보았다.


“너희 둘 중 하나가 삐치는 꼴을 공평의 아이콘인 내가 어떻게 보겠니? 그런 차원에서 오늘밤은 하비 월뱅어! 땅땅!”


주먹으로 식탁을 가볍게 두 번 내리치며 문비가 선언했다.


“뭐래.”

“아, 뭐야.”


인우와 세진이 어이없어 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결국 식탁에 올라온 건 세 종류의 술 모두였다. 셋 중 누구도 자신이 선택한 술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셋이 각자 자신이 마실 술을 만들고, 마시고, 자화자찬하는 것으로 술자리의 막이 올랐다.


“얘들아, 사실은 나 너희한테 할 말이 있어.”


하비 월뱅어 한 잔을 다 마셔갈 즈음 문비가 운을 뗐다.


“근데, 듣기 전에 다짐을 좀 받고 싶어.”


“다짐씩이나?”

“무슨 말을 하려고?”


세진과 인우가 거의 동시에 물었다.


“듣는 동안에든 듣고 나서든 심각해지지 말 것. 무거워지지 말 것. 어두워지지 말 것.”


문비의 말에 두 친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빛에 고인 불안과 염려가 교차했다.


“그거, 지금 그거, 그걸 하지 말라고. 어? 얘들아, 그래줄 수 있지?”


두 손으로 친구들의 어깨를 하나씩 짚으면서 문비가 담담하게 부탁했다. 왠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인우와 세진이 낯빛을 고치고 ‘그래, 알았어.’하고 대답했다.


잔에 남은 오렌지색 술을 마저 꿀꺽 마시고 나서 문비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후곡절을 듣는 동안 세진과 인우는 몇 번이나 저도 모르게 심각해져 버리는 표정을 애써 수습해야만 했다.


문비의 이야기가 끝나자 정적이 흘렀다. 문비는 담담하게 새로 하비 월뱅어를 만들었다. 유리잔과 얼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아니야. 아직 아니야.”


안거나 다독이기 위해 내미는 친구들의 팔을 문비가 부드럽게 물리쳤다.


“친구들아, 잔 들어, 잔. 우리, 지금까지 지내던 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자. 그러고 싶어. 서로서로 놀려먹고, 농담하고, 장난치고. 나는 그러기로 했으니까. 너희가 필요할 땐 내가 먼저 손 내밀게. 어깨 빌려달라고 할게.”


인우와 세진이 ‘흠, 흠.’ 무언가 삼키기 힘든 걸 억지로 삼키는 듯한 헛기침을 하고는 작게 끄덕였다.


문비가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괜찮을 거야. 너희가 내 안전그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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