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눈이 봄을 꿈꾸는 소리

by 화진


짧은 2월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꾸준하고 순하고 고운 비였다.


이 비가 얼음과 잔설을 녹이고 봄을 불러들일 터였다. 이제 땅이 푹 젖고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면 흙속의 씨앗과 나무의 잎눈이 통통하게 부풀 것이다. 그러고는 바깥세상으로 머리를 내밀고 싶어 용을 쓸 것이다. 그런 시절을 재촉하는 마침맞은 단비가 오고 있으니까.


비 내리는 날 누군가를 기다리기에는 넓은 창이 있는 장소가 제격이다. 마침 문비가 찾은 카페에도 통창이 있었다. 아쉽게도 창가에는 빈 테이블이 없었지만 안쪽 테이블에 앉아 바라보는 조망도 꽤 괜찮았다. 잔디가 깔린 작은 마당에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마주 서 있었다.


비에 흠뻑 젖은 나무를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늘잎에 덮인 겨울눈이 물을 머금으며 봄을 꿈꾸는 소리 같은 것. 문비는 이 소리를 기억해 두기 위해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머릿속으로는 칼림바 연주를 그려 보았다.


“벌써 와 있었네? 나도 약속 시간보다 빨리 왔는데.”


영채가 문비의 손을 잡으며 반가운 웃음을 띠었다.


“저도 방금 왔어요.”


고모를 향해 문비도 미소를 보였다.


“우리 제법 오랜만이지? 네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해줘서 어찌나 기쁘던지.”


영채는 자리에 앉고도 문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았다. 영채의 눈빛은 문비를 향한 조심스러운 질문과 부드러운 만류를 담고 있었다.


“어떻게 결심하게 됐는지 궁금하신 거죠?”


문비의 말에 영채는 그렇다고 눈짓으로 대답했다.


“짧게 줄이면 제 마음 하나 편하고 싶어서예요. 들어주실 시간 있으시면 오늘 길게 말씀드릴 수도 있는데…….”


문비는 아버지를 위해 신장 공여자 검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문비의 아버지인 영후는 이제 와 문비에게 그런 짐을 지우기를 진심으로 원치 않았다. 그러나 문비는 강행할 작정이었다.


“있어, 많아. 네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어, 시간. 그런데…… 네 마음 편하고 싶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구나.”


혹시라도 자신의 어머니이자 문비의 할머니인 옥선의 성화가 성가시고 괴로워서 내린 결정인가 싶어서 영채는 찜찜했다.


“할머니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뭐랄까.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가 나중에 돌이킬 수도 없는 시점에 가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후회를 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홀가분하게 살아가고 싶어서요. 생판 모르는, 순전히 타인인 누군가에게 오직 선의로 이식해주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은 못 되지만……. 남이 아니라 어쨌든 제 아버지니까요.”


지난 번 만났을 때보다 조금 야윈 듯한 문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영채는 눈물을 글썽였다.


“고마워서 어쩌니. 고맙다.”


카페를 나온 문비는 엄마와 살던 집으로 고모를 모시고 갔다. 자신과 부모님 그리고 생모인 이설을 둘러싼 복잡하고 긴 사연을 고모에게 들려주기에는 집이 가장 낫다고 판단했다.


문비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짙었고 비는 그쳐 있었다. 영채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눈물을 닦아냈다.


“안 되겠다. 나도 반대야. 네가 신장 공여하는 거 나도 못 봐. 그건, 그건 정말 아니야. 오빠가 왜 그렇게 강경하게 안 된다고 했는지, 그 마음을…… 내가 이해하게 될 줄 몰랐는데, 정말이지 이해가 되는구나. 다는 아니겠지만 이해가 가,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영채는 문비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문비가 정인 언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지만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시력을 잃을 거라는 말은 가히 이제껏 받아 본 적 없는 충격이었다.


“고모. 저 괜찮아요. 이러시라고 말씀드린 거 아니에요. 제가 고모 좋아해서, 고모 보면 꼭 엄마 보는 것 같을 때가 있어서, 고모는 믿을 수 있어서 다 말씀드린 거예요. 그러니까 제 결심 지지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어떻게 그러겠니. 너한테, 우리가 어떻게…….”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솔직히 다 놓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정말 아니에요. 저, 다시 꿈도 생겼고, 작은 것에 행복해지기도 하고 그래요. 주위를 둘러보니 적지 않더라고요. 절 사랑해주는 사람들 말이에요. 아무 조건 없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들, 제가 닮고 싶은 사람들이요.”


문비가 고모의 어깨를 안고 덧붙였다.


“고모도 포함이에요.”


영채는 흐느낌을 삼키며 고개만 가로저었다.


“아직은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나중 일은 나중에 가서 생각해요, 우리. 그러니까 오늘만 슬퍼하시고 내일부터는 다시 예전처럼 대해 주세요. 그렇게 해주셔야 제가 편하게 고모 볼 수 있어요. 네?”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문비의 등을 쓸어내리며 영채는 끄덕였다. 미안하고, 고맙고, 대견하고, 가슴 아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비는 자신의 뜻대로 신장 공여를 위한 사전 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식 불가 판정을 받았다. 문비의 신장 둘 중 하나만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문비는 낙심했지만 영후와 영채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문비는 산골 마을 인우네 별장으로 돌아갔다. 당분간 거기에서 지낼 참이었다. 당분간이 몇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은 그 산골 동네만큼 아늑하고 좋은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연둣빛 새순이 자연의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새봄이 산골짜기에 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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