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마을의 봄은 졸음 겨운 고양이의 걸음처럼 느릿하게 사뿐사뿐 찾아왔다. 산과 숲이 연한 물빛으로 아른대다 어느 결에 연초록의 세상이 되었다. 아침이면 흙과 초목의 냄새가 싱그럽고, 낮이면 새 소리가 청명한 나날이었다.
햇볕 포근한 어느 봄날 문비는 부드러운 흙에 씨앗을 심다 말고 생각했다. 마음에 대해, 아무런 이유 없이 타인에게 친절이나 환대의 씨앗을 심어주는 마음들에 대해.
어떤 씨앗은 춥고 황량한 가슴에서 무력하게 녹아 버릴 터였다. 어떤 씨앗은 무사히 자라 열매를 맺고 다시 누군가에게로 건너갈 테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조금 떨어져서 씨앗을 심고 있던 은성이 문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은성과 문비는 지금 은성의 집 앞 언덕 아래에 계단참처럼 자리 잡은 밭에 있었다. 그동안 내내 묵밭으로 방치해 두었던 것을 시원하게 갈고 퇴비를 주어 쓸 만한 밭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동네 세 할머니의 전폭적인 도움 덕분이었다.
“네? 아, 아니에요. 그냥…… 이 작은 씨앗에서 싹이 나고 그것이 흙을 비집고 나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게 새삼 신기해서요.”
놀고 있던 손을 다시 부지런히 놀려 흙을 파고 씨앗을 묻으면서 문비가 말했다.
“맞아. 신기한 일이야. 여름이 와서 이 밭이 노란 꽃으로 가득 찰 거라는 게 아직은 상상이 잘 안 가. 노랗게 핀 꽃이 붉게 변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 씨앗이 홍화 씨앗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될 텐데도 말이야.”
은성의 목소리는 기대에 차 밝았다.
“홍화꽃을 수확하고 나면 밭을 다시 갈아서 가을메밀을 심어도 될 거라고 세 할머니들께서 알려주셨어. 그럼 시월에 하얗게 핀 메밀꽃을 볼 수 있대.”
홍화꽃에서 천연 염료를 얻는 게 은성이 홍화를 심는 목적이었다. 꽃 수확이 늦어지지만 않는다면 메밀도 심어볼 작정이었다. 메밀꽃이라니, 시월의 눈꽃처럼 예쁘겠지, 은성의 눈이 즐겁게 반짝였다.
“메밀꽃이라, 좋은데요?”
둘은 서로 마주 웃고 나서 다시 열심히 일했다. 거의 끝이 보인다 싶어 잠시 허리를 펴던 문비의 눈에 밭의 저쪽 끄트머리에서 핸드폰을 들고 사진이라도 찍는 듯한 은성이 보였다. 야생화라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뭘까 궁금해진 문비가 은성에게로 다가갔다.
“와, 노루귀꽃. 예뻐라.”
문비의 탄성에 은성이 깜짝 놀라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분홍색이네. 보라색은 많이 봤는데 분홍색은 잘 못 봤던 것 같아요.”
“그, 그래? 노루귀꽃이구나. 난 처음 보는 꽃이야. 근데 예뻐서…….”
은성이 뺨이 붉어진 채 허둥지둥하는 것을 문비는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은성의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연속적으로 메시지 수신음이 났다. 그러나 은성은 못 들은 척 딴청을 하더니 밭고랑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비는 빙긋 웃으면서 자신이 일하던 이랑으로 돌아갔다.
요즘 들어 은성은 자주 이런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수줍게 웃다가, 다른 사람의 기척에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 이럴 때의 은성은 어쩐지 더 예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문비는 짚이는 바가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거나 은성에게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어쩌면 은성도 이런 문비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
산책이 예정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이슬 젖은 숲길이 청신하고 상쾌해서 자꾸만 더 걷고 싶은 아침나절이었다.
“나 곡 만드는 거 배우기로 했어요. 그림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그리려고 해요. 그런데 세밀하게 그려야 하는 식물화 말고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그리고 싶은 걸 그릴 거예요.”
명랑하게 말하는 문비를 라한이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문비가 계속 말했다.
“아버지께 부탁드렸어요. 최대한 실기 위주의 단기 속성으로 화상 수업을 해 달라고.”
라한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문비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잘됐어요. 잘한 거예요.”
“그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요?”
이제 스노우베어 건은 문비에게도 지나칠 수 없는 관심사가 되었다.
“진전이 없어요. 팽팽해요.”
본가에 갔다 어젯밤에 돌아온 라한이 대답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그의 어조는 산뜻하고 가벼웠다.
스노우베어 GC의 미래를 놓고 할머니와 은휘 누나는 좀처럼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새중간에 끼인 처지면서도 라한은 그 문제로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이 사태에 휘말리는 대신 자신이 얻은 것을 생각하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요? 당신 마음은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전혀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엄밀히 보자면 난 할머니가 세워 놓은 허수아비 비슷한 그런 역할이에요. 할머니께서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대비해 두셨더라고요. 그리고 난 아버지나 은휘 누나 입장도 이해가 돼요. 그래서 나를 다그치셔도, 곤란하기는 해도 서운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좀 죄송하죠.”
“결국 할머니께서 이기시겠죠?”
계속 걸으면서 문비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럴 것 같아요. 왠지 당신은 우리 할머니 편일 것 같은데, 맞죠?”
라한의 눈에 장난스러운 웃음빛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한 적 없는데?”
말과는 딴판으로 들켰다는 표정으로 문비가 웃음을 깨물었다.
“느낌이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사실은 그래요. 난 남의 일이고 남의 재산이니까 골프장보다는 자연이 좋다 싶죠.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리신 할머니도 진짜 멋있고 존경스럽고.”
“할머니께 당신이 직접 말씀드리면 엄청 좋아하시겠네. 다음에 같이 할머니한테 안 갈래요? 당신 보고 싶어 하시는데.”
문비가 멈춰 섰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를 따라 시선을 준 곳에 돌배나무가 있었다. 희고 청초한 꽃이 붓으로 그린 듯 정갈하게도 피었다. 아, 이 돌배꽃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보다, 싶었다.
나란히 선 채로 같은 방향에 시선을 주고 있던 라한의 앞으로 문비가 팔짝 뛰어 자리를 옮겼다. 그를 마주본 그녀가 그의 어깨를 잡고 까치발을 했다. 그러고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가요. 갈게요.”
라한이 기쁘게 문비를 끌어당겨 품에 가두고 다시 키스했다. 잠시 후 문비가 땅바닥에 떨어진 돌배꽃을 주우며 말했다.
“나는 모험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마침내 떠나고 있는 거예요. 모험을.”
“모험?”
당신에게 나는, 모험인가?
“그래요, 모험.”
우리 사랑이, 내 삶에 당신을 들여놓는 일이, 당신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나에게는 모험이에요.
“당신을 만나서 깨달았거든요.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무지개가 있는지 별들이 있는지 알아내려면 모험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이전의 나는 핑계만 대고 있었어요. 신발이 없어서 떠나지 못한다고. 기타가 없어서 떠나지 못한다고.”
문비가 덧붙이자 라한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굳건히 고쳐 잡았다.
“신발이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신발을 마련하고 나면 모자가 없어서 떠나지 못한다고 하겠죠. 기타가 없었던 사람은 기타를 마련하고 나면 피리가 없어서 떠나지 못할 거고.”
“맞아요. 정작 중요한 건 신발이나 기타가 아니라 그저 떠나겠다는 마음 하나였어. 그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였어.”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어요. 혼자가 아니라는 거. 지금 우리, 같이 떠나는 거잖아요.”
곁에 있는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듯 라한이 잡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설령 모험의 끝에 저 산 너머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가는 동안의 햇빛과 이슬과 바람과 새 소리와 숲 내음과 흙의 감촉…… 그런 것들은 우리의 것일 테니까. 어쩌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았던 모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모든 걸 우리가 함께 보고 듣고 느낀다면.
그 생각을 긍정하듯 머리 위에서 새하얀 돌배꽃이 바람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침 해는 나뭇가지 사이로 환한 빛살을 내리뻗었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