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훨씬 큰 달은 거대한 야광석처럼 빛나며 주위 하늘을 푸르게 밝혔다. 위치로 보아 아직 밤은 한참일 것이었다.
바로 앞에 자라는 메타세쿼이아의 가지가 창문에 닿을 듯 가까웠다. 오래 묵은 거대한 나무의 우듬지는 3층을 넘어 지붕 위까지 뻗어 있었다. 유사시에 몸을 피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두 번째 벽면의 책들을 거의 다 확인했을 때 라무스의 귀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라무스는 책장 옆 안쪽으로 들어간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살그머니 문이 열리고 수상쩍은 누군가가 들어왔다. 라무스의 예리한 눈이 빠르게 그를 뜯어보았다.
검은 옷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 이라기엔 몸태가 연약하고 중성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렇다면 혹시 남장을 한 여자인가?
‘뭐지? 누구지? 저치도 귀중품이나 훔치러 온 평범한 도둑은 아닌 것 같은데?’
라무스는 잠시 관망하기로 했다. 서재에 들어왔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지만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상대를 제거해야 할지도 몰랐다.
저쪽도 야광석을 꺼내 책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설마 나와 목표가 같은 건가?’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라무스가 찾는 그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자들이 암암리에 꽤 존재했다. 다만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를 알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것을 소유하고도 거기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모를 수도 있었다. 이 서재의 주인인 레이디 프레케스처럼.
복면인이 아까 라무스가 훑었던 벽면 책장 전체를 일람하고 창문으로 다가갈 때까지 라무스는 숨죽인 채 지켜만 보았다.
복면인은 창 바로 밖의 메타세쿼이아에 눈길을 주고 나서 창문 걸쇠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걸쇠가 풀려 있는 것을 미심쩍어하는 모양이었다. 다피넬이나 마르타가 잊고 잠그지 않은 것인지, 그게 아닌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저쪽이 긴장한 듯 서재를 둘러보는 동안 라무스는 뒤로 물러나 몸을 완전히 숨겼다.
무거운 정적과 무심한 달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복면인은 안심한 듯 이쪽 벽면의 책들을 향해 야광석을 가져다 댔다.
바야흐로 라무스가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저 여자를 어찌할 것인지. 라무스가 몇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사이 또 다른 변수가 그를 압박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대화하는 말소리.
‘젠장! 때를 잘못 택했군.’
라무스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발소리와 말소리가 서재 문 너머에서 멈췄다. 그들이 곧 서재로 들이닥칠 터였다.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복면인이 라무스가 숨어 있는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서재 문이 열렸다.
“……!”
이미 예상을 했던 라무스는 한 팔로 복면인의 양 팔과 허리를 한꺼번에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정말 남장 여자였군.’
라무스는 소리 없이 실소했다.
촛불을 든 다피넬과 마르타가 서재로 들어섰다. 다피넬은 책상 위에 촛대를 내려놓고 책장으로 향했다. 마르타는 책상 옆 의자에 앉아 들고 온 뜨개질감을 잡았다.
“꿈에 그이가 나왔어.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하던 장면이 꿈에서 그대로 펼쳐졌지.”
작고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책상으로 간 다피넬이 감회에 젖어 말했다.
“돌아가신 공작님께서는 마님께 참으로 다정하셨지요. 저를 비롯해서 아랫사람들에게도 관대하셨고요.”
마르타가 고개를 들어 다피넬의 손에 들린 책을 건너다보았다. 다피넬은 마르타를 향해 쓸쓸하게 웃어 보이고는 책을 폈다.
요절한 남편 키테르와 다피넬이 결혼 전에 주고받았던 편지와 시 같은 것들을 모아 엮은 것이었다. 키테르가 손수 만든 수제품으로 오직 한 권뿐인 특별한 그 책을 다피넬은 몹시 아꼈다.
다피넬은 책을 읽고, 마르타는 뜨개질을 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한쪽 모퉁이의 어두운 공간에 숨은 라무스와 복면의 여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은 그 자세 그대로 숨어 있는 게 둘 모두에게 최선이었다.
라무스와 여자가 서로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얻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레이디 시스?’
여자에게서 희미하게 과일 내음 같은 것이 났다. 라무스는 신랑 대역으로 신전에 섰을 때 그리고 헛간에 갇힌 시스를 구해주러 갔을 때도 은은하게 떠돌던 그 향을 기억했다. 과일 중에서도 배의 향이었다.
시스는 자신을 옭아맨 괴한이 라무스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녹스 용병단 소속이라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팔과 허리를 압박하고 있는 그의 강인한 팔에 달린 손, 그 손에 쥐어진 독특한 무기 때문이었다.
그 무기의 날카로운 끝이 옷을 파고들어와 시스의 갈빗대 사이에 살짝 닿아 있었다. 조금만 수상쩍게 움직이면 그게 곧장 시스의 몸을 뚫고 들어올 것이었다.
끝이 바늘처럼 뾰족하고 크기가 작으며 부드럽게 휘어진 모양의 접이식 단검. 텔룸과 인접해 있는 루나리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녹스 용병단이 지니는 필수 장비의 하나였다.
‘녹스 용병이 여기까지 와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시스가 찾을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이 안에 녹스 용병단이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찾는 그것인가? 이 자의 목표도? 그나저나 불편해 죽겠어. 이봐. 그렇게 세게 잡고 있을 필요 없다고. 나도 저들에게 발각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숨을 죽인 그의 가만한 숨결이 시스의 귀 뒤쪽에서 느껴졌다.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에 낀 장갑에서는 희미하게 송진 냄새가 풍겼다.
송진. 이것도 녹스 용병단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쥔 손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평소 송진 가루로 장갑을 손질해 두었다.
마침내 다피넬이 책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마르타가 그녀를 따라 일어나 뜨개질하던 것을 챙겨 들었다. 길고 괴로운 시간이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시스와 라무스는 각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 두 사람이 나가고 나면 새로운 국면, 새로운 문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