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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Nov 22. 2024

25. 달밤의 그림자


 어깨가 들썩이도록 숨을 몰아쉬던 데세르는 이를 악물었다. 시스의 마지막 말이 그의 아픈 데를 찔렀던 것이다. 병들어 골골하는 주제에, 라는 환청이 데세르의 뇌리에 메아리쳤다. 


 시스의 뒷모습에는 한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데세르의 열망은 그 한기에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집요하게 타올랐다.  


 고통 속에서 데세르는 다짐했다. 반드시 그녀를 굴복시키고 말겠노라고. 


 서재를 나간 시스의 시선에 복도를 서성이는 레투스가 들어왔다. 


 “레투스.”


 “예, 아씨.”


 레투스가 빠른 걸음으로 시스 앞으로 와 허리를 살짝 숙였다. 


 “공작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으니 얼른 들어가 봐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허겁지겁 서재로 뛰어드는 레투스를 뒤로 하고 시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청소를 하던 하녀를 붙잡고 물었다. 


 “혹시 넬리사 어디에 있는지 아나요?”


 하녀는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아마 주방에 계실 거라고 대답했다.


 주방에서 요리사와 수다를 떨고 있던 넬리사는 갑작스런 시스의 등장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냉큼 일어나 자세를 가다듬었다. 


 요리사도 깜짝 놀라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다 그만 옆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뚱뚱한 그의 몸이 딱하게도 의자에 끼었던 것이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시스는 뛰어가서 요리사를 일으켜줌으로써 순박한 그를 더더욱 놀라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이는 많지만 요리 솜씨만큼은 조금도 녹슬지 않은 그의 이름은 케레스였다. 


 “아이구, 아씨. 보잘 것 없는 늙은이에게 귀하신 손길을…… 이 케레스,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넬리사는 제가 좀 데려갈게요.”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보인 시스가 넬리사의 손을 잡아끌고 주방을 나섰다. 


 “레이디 시스. 무슨 일이에요?”


 “너무 갑갑하네요. 나가서 말도 좀 달리고 바람도 쐬고 싶은데.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요.”


 넬리사가 방긋 웃었다. 말에 올라 신나게 질주하는 일이라면 넬리사도 꽤 즐기는 바였다. 마침 눈도 그치고 바람도 약해진 맑은 날이었다. 


 오전 내내 시스는 넬리사와 함께 말을 타고 저택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바람을 쐬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시스에게는 다른 숨은 목적도 있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까 주변 지리를 익혀 두어야 해.’


 끝내 데세르가 이 결혼의 중대한 결함 즉 가짜 신랑을 내세운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결혼의 유지를 고집한다면? 


 그렇다면 시스에게는 이곳을 떠날 편법이 필요해질 터였다. 일찌감치 이런저런 경로와 방법을 모색해 두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


 춥고 맑은 밤이었다. 유난스레 크고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하얗게 쌓인 눈이 달빛을 반사하여 밝기를 더했다. 


 잠과 고요에 잠긴 프레케스 저택에 검은 그림자가 숨어들었다. 그림자는 조용하게 데세르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림자는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 서재에 달빛을 들였다. 그러고는 깊이 덮어썼던 후드를 벗었다. 그림자의 얼굴이 희붐한 빛 속에 드러났다. 


 그는 창고에 딸린 방에 묵고 있는 라무스였다. 어느 순간 라무스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았던 것이다. 조금씩은 다른 초상화였지만 단 한 사람을 그린 것이었다. 시스, 레이디 시스. 


 온통 시스의 초상화로 가득한 벽을 달밤에 맞닥뜨린 느낌은 기묘했다. 결코 예사롭다고는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데세르 공작,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 혹시 좀 미친 놈인가?’


 개운치 않은 기분에 미간을 일그러뜨린 라무스가 서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먼저 책장에 꽂힌 책들의 책등을 훑었다. 다음으로 서랍과 선반을 소리 없이 뒤졌다. 


 마지막으로 라무스는 벽감에 놓인 금고를 열었다. 거기에서 또 나오는 시스의 초상화에 라무스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초상화를 금고 안에 되돌려 놓던 라무스는 가장 어려 보이는 시스의 모습에서 웬일인지 친숙함을 느꼈다. 그는 그 초상화를 창문 가까이로 가져가 달빛에 비추었다. 


 라무스의 눈에 그림 속 어린 소녀를 짓누르는 외로움과 비애가 보였다. 


 그래, 그런 거겠지. 라무스는 혼자 끄덕였다. 괜스레 친숙하게 느껴졌던 까닭은 자신의 소년 시절에도 저런 외로움과 비애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초상화를 넣고 금고를 닫은 라무스는 서재를 나왔다. 여기에는 그가 찾는 물건이 없었다. 라무스는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으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새 목표 지점은 별관, 정확히는 다피넬의 서재였다. 별관 역시 모두들 자고 있어 정적이 고여 있었다. 라무스는 어렵지 않게 건물 안으로 잠입해 서재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데세르의 서재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군. 거기가 서재보다 화실이라면, 여기는 오티움의 도서관을 닮았어.’

 크기도 데세르의 서재에 비해 세 배쯤은 커 보였다. 


 긴 두 벽을 가득 메운 책장에 꽂힌 셀 수 없이 많은 장서들. 벽의 한 면을 차지한 여러 단의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골동품과 희귀품. 깔끔하고 압도적인 정경이었다. 


 라무스는 감탄했다. 그리고 이내 탐색을 시작했다. 그가 찾는 것은 책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었다. 


 다만 아주 오래된 무엇이며 반드시 어떤 글귀를 품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옛 시대의 문자로 이루어진.


 야광석을 꺼내 책등을 비춰 보면서 라무스는 꼼꼼히 살펴 나갔다. 


 한 벽면에 꽂힌 책등을 전부 살피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건 이쪽에 고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고서는 만듦새와 글자체가 확연히 달라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았다. 


 저쪽 벽의 책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라무스는 가까이에 있는 창문으로 갔다. 만약을 대비해 걸쇠를 풀어놓고 커튼을 걷어 창밖을 살폈다. 


 달빛이 라무스의 청흑색 머리카락으로부터 이마와 콧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라무스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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