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했었지 않소. 초상화 속 여인이 실제로 존재할 줄은 몰랐었다고.”
“아, 그 얘기.”
시스도 기억이 났다. 어제나 지금이나 허황되게 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설마 지금, 당신이 말하는 그 초상화가 나를 그린 초상화라는 말인가요?”
데세르가 느리게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자세히 설명해 봐요. 초상화라니, 도대체 무슨 소린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으나 시스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초상화에 대한 시스의 궁금증이 데세르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낙관적인 전망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여겼다.
“설명해줄 테니 일단 따라오시오.”
앞장 서 걸어가는 데세르를 시스는 잠자코 따라갔다. 데세르가 발을 멈춘 곳은 그의 서재 앞이었다.
“자, 보시오.”
서재의 문을 연 데세르가 안쪽의 벽을 가리켰다.
복잡한 감정들이 시스의 얼굴에 시시각각 떠올랐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떠올랐다. 시스는 어떤 감정을 가장 먼저 드러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벽 전체에 초상화가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온통 시스의 얼굴이었다. 어린 소녀인 시스부터 성년이 된 시스까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건조하고 딱딱한 어조였다. 시스는 꺼림칙하고 경악스럽고 불쾌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리로 와서 이걸 먼저 보시오.”
초상화를 향한 자신의 열정을 시스가 깨닫지 못한 것 같아서 데세르는 조바심이 났다. 이 상황이 시스에게 기괴하고 끔찍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자신의 진심과 초상화에 얽힌 진실은 고귀했으니까.
우연과 운명. 이것이 데세르가 시스에게 설명하고자하는 초상화의 진실이었다.
벽감에 놓인 금고를 연 데세르가 벽에 걸린 것보다 작은 크기의 또 다른 초상화를 꺼내 시스에게 내밀었다.
“이 초상화는…… 이게 왜 여기에?”
혼잣말처럼 시스가 중얼거렸다. 초상화 속 시스는 열 살이었다. 레이디 앙켑세라의 저택에서 지낸 지 꼭 일 년이 되던 날에 그려진 것이었다.
앙켑세라는 하숙생들이 자신의 집에 온 날을 기점으로 일 년마다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하숙생들의 본가로 보내는 용도였기에 초상화 속 인물의 자필 서명이 필수적이었다.
시스도 매해 같은 날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만났다. 그러나 시스의 초상화를 보내는 일은 고작 세 번으로 끝이 났다.
“글라키에사 공작께서 이제 초상화는 그만 보내도 된다고 하시네?”
세 번째 초상화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앙켑세라가 시스를 불러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린 것이었다. 열두 살의 시스는 묵묵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설마 이 다음해의 초상화도 저기에……?”
자신의 서명을 보며 잠시 회상에 젖었던 시스가 금고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앙켑세라의 집에서 그렸던 세 점의 초상화를 시스가 차례로 확인하는 동안 데세르는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이윽고 시스는 초상화들을 조용히 내려놓고 데세르를 바라보았다.
“이 초상화들을 손에 넣은 경로는 짐작이 가요. 샀을 거예요. 맞죠?”
글라키에사 공작이 앙켑세라에게 더 이상 시스의 초상화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그 시점에 샬린은 마음먹었을 터였다. 기존의 초상화들도 공작 가에서 치워 버리자고.
‘믿을 만한 측근을 시켜 내다버리거나 헐값에 팔아 버리거나 했겠지. 이후로 돌고 돌다 데세르의 손에까지 들어왔을 테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샬린의 얼굴이 떠올라 시스의 심기는 더욱 언짢아졌다.
“산 것이 맞소. 우연히 보게 되었고, 보는 순간부터 그 초상화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으니까.”
“어디죠? 처음 보았던 장소가? 세 점을 한꺼번에 손에 넣었나요?”
“이곳 타키툼의 화구 가게였소. 주인인 화구상이 안목 있는 사람이라 화구 말고도 그림이나 골동품 같은 것들을 다양하게 취급하오.”
데세르는 어려서부터 그 가게의 단골이었다. 골동품 쪽에 관심이 지대한 다피넬도 그 화구상의 귀한 고객이었다.
“안목 있는 화구상이라면서 왜 이런 그림을 사들였을까요? 솔직히 그림 자체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잖아요. 모르고 보면 그럴듯해 보여도 그림 볼 줄 아는 사람 눈에는 화격이 떨어지는 게 뻔히 보일 텐데.”
앙켑세라는 하숙생들의 본가에 보내는 용도의 초상화에 비용을 많이 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고용하는 초상화가는 제대로 된 화가가 아닌 화가 지망생들이었다.
그나마 지망생들 중에서 싹수가 있어 보이는 이들을 앙켑세라는 필요할 때마다 새로 고용했다. 앙켑세라가 지불하는 보수는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림의 수준만큼이었다.
“화구상이 본 가치는 그림 자체가 아니라 그림 속 인물에 있었을 거요. 내가 그랬듯이.”
화구를 사러 간 데세르에게 화구상은 ‘도련님께만 특별히 보여 드리는 물건입니다’라고 속삭이며 꽁꽁 싸매어 두었던 그림 세 점을 내놓았다. 데세르가 갓 열다섯 살이 되던 봄이었다.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총명해 보이는, 아름답지만 서늘한 기운이 배어나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의 초상화였다.
세 점의 초상화 속에서 소녀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담녹색으로 빛나는 두 눈은 한결같이 신비감을 자아냈다. 그 눈에 데세르는 즉시 마음을 빼앗겼다.
“그가 이것들을 손에 넣은 곳은 페르베아투의 카푸에 있는 그저 그런 잡화상이었다더군.”
화구상은 초상화가 잡화상 구석에서 먼지와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말도 했지만 데세르는 이 부분을 생략했다.
시스는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시스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기존의 초상화를 참고하여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림들 속에서 시스는 조금씩 성숙해졌다.
마침내 시스는 현재의 자신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 담긴 초상화 앞에 섰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내 초상화라고 하겠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매기라면 나로서도 높은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