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티움에서 만나 연인이 되거나 나중에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긴 있었다.
그런 경우 교제는 대개 수업이 끝나고 나서 이루어지는 스터디 그룹이나 가끔씩 초대받는 유력 가문의 파티에서 이루어졌다.
학교 바깥에서 발견되는 오티움 연인에 대해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해주는 것이 학생들 뿐 아니라 교수들 그리고 텔룸 시민들에게까지 불문율로 정착되어 있었다.
이 불문율과 연애를 금하는 교칙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유연성이 학생들의 숨통을 틔워 주는 동시에 오티움의 기강을 훼손하지 않는 비결인 셈이었다.
“어머나, 그런 불문율이라니. 텔룸은 역시 로맨틱한 도시로군요?”
“자유로운 기풍이 강하고 젊음의 도시인 건 확실해요.”
오티움이 있어 티토니아 대륙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도시인만큼 텔룸은 활기와 생동감이 넘쳤다.
“사실 저는 텔룸에 그리고 오티움에 가고 싶었어요. 자유로운 도시와 캠퍼스의 낭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잖아요? 그런데 제 부모님은 딸을 공작 가의 시녀로 보내 높으신 귀족들의 품행과 범절이나 익히도록 하는 걸 제일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고루한 분들이죠. 아아, 슬픈 일이에요.”
볼멘소리를 하는 넬리사는 소녀 같았다. 무조건적이고 풍요로운 애정 속에 응석받이로 자라 제멋대로인,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심술이 난 소녀.
그런 면에서 시스는 넬리사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시스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사랑이라는 보호막 없이 자라야 했으니까.
시스가 어머니로 사랑했던 레이디 페로니아는 시스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고,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리고 페로니아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스는 내쫓기다시피 글라키에사 가를 떠나야 했고 이후로 쭉 텔룸의 하숙집에서 지내왔다.
심지어 하숙집으로 들어가고 삼 년 후부터는 글라키에사 가에서 경제적인 지원을 거의 끊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처음 삼 년 치의 하숙비를 제대로 치른 건 앙켑세라가 선불을 요구한 탓에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열두어 살 무렵부터 시스는 벌이가 되는 일을 찾아야 했고, 레이디 앙켑세라에게 빚을 지기 시작했다.
앙켑세라는 ‘계산은 확실히’라는 모토를 내건 사람답게 그때그때 시스로부터 회수할 수 있는 만큼씩 차근차근 회수했다. 절대로 감면은 없었으나 새롭게 차용해주는 것은 마다치 않았다.
둘 사이의 약정서가 늘어갔고 시스의 빚은 조금씩 줄다가 크게 불어나기를 반복했다. 앙켑세라의 계산은 언제나 확실했다.
조금 특이한 점은 앙켑세라가 빚을 받는 방식에 다양성과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자신의 외출에 시스의 동행을 요구하는 대신 그 일의 대가를 계산하여 빚에서 제해주는 식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시스에게 요구되는 모종의 역할이나 임무가 꼭 있었다.
“넬리사는 운이 좋은 거예요. 한없이 안온한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이 계시니까. 물론 그 사랑의 방식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요.”
그 당연한 것을 너무 일찍 잃어버린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아니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레이디께서 무슨 그런 노친네 같은 소리를?”
함께 아침을 먹으며 담소를 좀 나누었다고 넬리사는 부쩍 시스에게 친근하고 무람없는 태도를 보였다.
시스는 피식 웃었다. 굳이 넬리사의 말투를 지적하면서 지위의 차이와 예의를 따지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진정한 우정을 나눌 의사도 없었고. 그저 적당한 선에서 무난하게 지내면 그만이었다. 시스는 여기 오래 머물지 않을 계획이었으니.
그래도 아침 식사와 유용한 정보들을 제공해준 보답으로 한 가지는 말해 주고 싶었다.
“텔룸으로 떠나지 못한 것이, 오티움에 가지 못한 것이 부모님 때문이라는 건 핑계인 것 같네요, 넬리사. 넬리사 자신이 진정으로 강력하게 원하지 않았던 거 아닌가요?”
넬리사는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히고 눈을 슴벅거렸다.
“결국 선택은 스스로 하는 거고, 원하는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요. 그 책임이 두려운 사람에게 핑계는 좋은 방패가 되어 주죠. 찾으면 널린 게 핑계고요.”
뜻하지 않은 숙제를 떠안은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보는 넬리사를 두고 시스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레이디 나이아시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때마침 레투스가 식당으로 시스를 데리러 왔다.
“알았어요.”
“공작님께서는 개인 응접실에 계십니다.”
레투스가 알려준 방으로 가는 시스의 발길은 날래고 결연했다.
“거기 앉으시오.”
약을 먹고 있던 데세르가 커다란 원탁에 딸린 의자를 가리켰다. 시스는 천천히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데세르는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어젯밤보다는 한결 혈색이 돌고 기운을 차린 기색이었다.
“나이아시스. 내 얘기를 먼저 들어주겠소?”
“그러죠. 그리고 그냥 편하게 시스라고 불러요.”
“그래요, 시스. 비웃음 받을 각오로 고백하자면, 사실 나에게 시스는 기적 그 자체요.”
기적이라니. 지나치게 거창하잖아? 시스는 내심 뜨악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데세르 쪽이 퍽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데세르는 말을 멈춘 채 시스의 눈을 정면으로 건너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대한 시스의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시스는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데세르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잠시 틈을 두었던 데세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비웃지 않아 줘서 고맙소. 이번에는 황당한 소리로 들릴 테지만 역시 고백하자면 나는 시스 당신을 오랫동안 그리워해왔소.”
듣고 있던 시스가 심각한 표정이 되어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린 어젯밤에 처음 봤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그리워하다니. 솔직히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리는군요.”
시스가 ‘어젯밤에 처음’을 힘주어 강조한 건 당연히 데세르가 신전의 결혼식에 오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의도였다. 그 의도가 그리고 찬란하고 차가운 시스의 눈빛이 데세르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