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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Nov 13. 2024

21. 양지쪽 같은


 “주방은 왜요? 이 시간에 벌써 아침을 드시려는……? 아아, 저런……!”


 천진하게 묻던 넬리사는 시스가 어제 저녁 식사를 굶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허기가 질 만도 하지. 넬리사는 친절한 웃음을 띠고 시스에게로 걸어갔다. 


 “식당으로 가 계세요, 레이디. 제가 주방에 가서 음식을 가져다 드릴게요. 마침 저도 뭘 좀 먹으려던 참이었거든요. 실은 제가 어제 좀 과음을 했더니 속이 쓰려서요.”


 배를 슬쩍 문지르며 넬리사가 윙크했다. 


 시스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직접 주방을 찾아가서 먹는다는 건 시스 자신은 아무렇지 않아도 주방 하녀들에게는 당황스럽거나 부담스러운 일일 테니까. 


 “아, 그래요? 그렇다면 부탁 좀 할게요.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시스가 가볍게 미소했다. 붙임성 좋은 넬리사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잘 사귀어 둬서 나쁠 건 없겠다 싶기도 했다. 


 같은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는 동안 넬리사는 시스에게 프레케스 가의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저택이며 딸린 건물들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넬리사는 자신이 말해 주는 것들이 시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시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넬리사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사실 도움이 되는 내용도 없지 않았다. 


 “저어, 레이디.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될까요?”


 얼추 알려 줄 것은 다 알려줬다는 표정으로 넬리사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녀의 두 눈에 기대와 동경의 빛이 타올랐다. 


 시스는 넬리사가 가진 귀하고 강한 것 하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충분히 사랑받고 자란 사람에게서 엿보이는, 환하고 솔직한, 양지쪽 같은 성품이 그것이었다. 


 “물어 봐요. 뭐가 그렇게 궁금하기에 그런 눈빛이 된 건지 나도 궁금하네요.”


 시스는 자기보다 두어 살 어릴 것이 분명한 넬리사를 향해 따뜻하게 웃었다. 프레케스 가에 와서 처음으로 내보이는 경계심 없는 얼굴이었다. 


 ‘오는 것이 있었으니 가는 것도 있어야겠지. 말빚도 빚이니. 단 나는 내가 갚고 싶은 방식으로 갚을 거야. 바꿔 말하면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오티움 말이에요. 정말 소문대로 그렇게 멋진 곳인가요? 레이디 시스께서 오티움을 졸업했다면서요?”


 “아아, 오티움?”


 텔룸에 있는 대학, 오티움. 시스가 텔룸의 유명 하숙집인 레이디 앙켑세라의 저택으로 보내지는 빌미가 되었던 학교였다. 


 “레이디 프레케스에게 들었나요? 내가 오티움을 나왔다고?”


 “다피넬 마님께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들 하던데요?”


 요컨대 넬리사가 들은 것은 풍문이라는 뜻이었다. 시스는 의문이 들었다. 


 ‘레이디 프레케스는 나에 대해 어디까지 제대로 알고 있을까?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글라키에사 공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그렇다면 어제 레이디 프레케스가 시스에게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납득이 갔다. 


 글라키에사 가도 페르베아투의 국왕도 시스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 없음을 레이디 프레케스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시스는 스스로에게 답했다. 


 ‘그래,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돌아갈 곳 없는 처지라는 걸. 어느 가문에서도 나를 위해 나서 주지는 않으리라는 걸.’


 어제의 의아함에 대한 답을 일부 찾은 것 같아서 시스는 홀가분해졌다. 


 “레이디 시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우리 오티움 얘기를 하던 중이었잖아요?”


 넬리사가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려 시스의 주의를 일깨웠다. 


 “아, 네. 오티움이라는 말에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추억에 젖었나 봐요. 그런데 내가 오티움을 졸업했다는 건 맞고 반은 틀린 소문이에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니? 어떻게요?”


 “학위증이 없거든요. 하지만 오티움에서 신학을 공부한 건 맞아요.”


 시스가 이렇게밖에 공부할 수 없었던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간단하게 시작되어 복잡하게 쌓여 간 ‘의지가지없는 레이디 시스의 텔룸 생존기’라고나 할까. 


 텔룸에서 겪은 시스 개인의 어려움과 우여곡절까지 넬리사에게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넬리사의 관심사도 그런 쪽은 아님이 뻔히 보였고. 


 “학위증이 없구나. 보고 싶었거든요. 오티움 학위증.”


 아쉬움의 크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김이 샌 넬리사의 말투에 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게, 나는 청강생이었으니까요. 모든 수업을 수료했지만 오티움의 학적에는 기록되지 않은 학생이죠. 아까 오티움이 멋진 곳이냐고 물었죠? 맞아요. 멋진 곳이에요.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들. 책과 잉크 냄새가 떠도는 넓고 조용한 도서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아담한 숲이며 정원들…….”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시스는 넬리사가 듣고 싶었을 법한 사실들을 나열했다. 들으면서 점점 들뜬 표정으로 바뀌던 넬리사가 시스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그 숲이나 정원의 으슥한 곳에 숨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도 있었겠죠, 물론?” 


 젊디젊은 남녀가 모여 있는데 연애 사건이 없을 리 없다는 것이 넬리사의 짐작이었다. 오티움의 연애는 넬리사가 품은 낭만적인 환상 가운데 하나였다.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학교 안에서의 연애 사건은 목격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요.”


 오티움의 교칙에 ‘연애 금지’ 조항이 있었다. 발각되는 즉시 양쪽 모두 퇴학이었다. 한 번 퇴학을 당하면 오티움과는 영원한 단절이었다. 이 교칙에는 예외도 관용도 없었다. 


 “수업 수준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거든요. 매일의 수업과 시험 일정도 빡빡하고. 공부에 뜻이 있다면 노닥거릴 시간은 별로 없다고 봐야죠.”


 “시간이 없어서 누굴 못 만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진짜 그렇게 엄격해요? 양쪽 다 퇴학? 설마 그럴 리가요. 은근슬쩍 눈 감아 줬던 예도 있긴 있겠죠.”


 넬리사가 연극적인 슬픈 빛을 과장되게 띠고서는 투정 부리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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