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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Nov 08. 2024

19. 모두에게 그럴듯한 그림


 시스는 고개를 들어 문을 주시했다. 


 도끼였다. 도끼날이 나무문을 뚫고 나왔다. 쇠와 쇠가 부딪는 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서 문에 찍힌 도끼의 머리를 쇠로 된 무언가로 가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헛간 문이 쩍 갈라지면서 자물쇠를 채운 부분이 통째 떨어져 나갔다. 


 “시…… 스.”


 숨을 헉헉 몰아쉬며 데세르가 문기둥을 붙잡은 채 시스를 불렀다. 그는 얼마간 숨을 고른 다음 힘을 내어 시스에게 다가왔다. 


 시스는 그다지 고맙지 않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풀려나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그럴듯한 그림이 될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미안하오.”


 시스를 풀어주는 데세르의 손이 떨렸다. 조금 전 도끼로 문을 부수면서 갑작스럽고 무리하게 힘을 썼던 여파였다. 


 “이런, 몸이 얼었군. 어서 갑시다.”


 데세르가 시스의 손을 잡았다. 시스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런데 뿌리쳐 버리면 그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 같았다. 한 자락 연민이 시스를 막았다. 


 본의 아니게 시스는 데세르의 손을 힘주어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팔을 잡았다. 언뜻 보면 시스가 데세르에게 매달린 듯한 모양새였으나 실상은 시스가 데세르를 부축하고 있었다. 


 시스의 뜻을 눈치챈 데세르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간힘을 써서 몸에 힘을 주고 자신이 그녀를 이끌고 가는 듯이 행동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가면서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헛간 모퉁이에서 은밀하게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 한 사람은 바로 라무스였다. 손을 굳게 잡고 멀어지는 데세르와 시스의 뒷모습을 보며 라무스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레이디 프레케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그림을 위해서 억지를 부리셨나 보군. 그리고 레이디 시스. 당신은 좀 의외로군. 데세르의 체면을 세워 주려고 애쓰다니. 어쨌거나 남편이라 이건가?’


 라무스는 가죽부대의 마개를 열고 입 안으로 와인을 흘려 넣었다. 그 훌륭했던 화이트 와인의 풍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웬일인지 입맛이 썼다. 


 “시간 낭비는 이 정도로 충분해.”


 라무스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밤은 이슥했고 눈송이는 그 사이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추적추적 무겁게 내려와 질척거리며 발을 적시는 눈이었다. 


 옷자락에 치덕치덕 들러붙는 눈을 보며 시스는 생각했다. 진눈깨비는 명분 없는 미련을 닮았다고. 


 데세르를 그의 방까지 부축해 간 시스는 그가 침대에 앉자마자 손을 떼고 물러섰다.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얘기를 좀 했으면 하오.”


 데세르는 대화를 원했지만 시스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보다 휴식이에요. 각자 잘 쉬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얘기는 내일 하기로 하죠.”


 감정을 절제한 얼굴로 시스가 말했다. 차분한 태도와 무미건조한 말에서 데세르는 어떠한 여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스는 단호하게 돌아서서 문을 향했고, 낙심한 데세르는 극심한 피로감 속에 눈을 감았다. 


 자신의 방으로 간 시스가 창문을 열었다. 


 얼마 안 있어 페로가 날아 들어왔다. 페로는 푸르르 몸과 날개를 빠르게 흔들어 진눈깨비를 말끔히 털어냈다. 이내 페로는 눈부시게 희고 보송보송한 자태로 돌아왔다. 


 페로의 촘촘하고 아름다운 털과 날개 안으로 눈이나 비는 파고들지 못했다. 표면에만 다소 묻을 뿐이었다. 흙먼지나 가랑잎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페로. 너 혹시 봤어?”


 침대로 들어간 시스가 물었다.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자리 잡은 페로가 머리를 갸웃하는 동작으로 되물었다.


 무엇을?


 “그 사기꾼 말이야. 나랑 신전에 있었던, 그리고 아까 헛간에 들어왔다 나간.”


 페로가 털투성이 머리를 끄덕했다. 


 “어디로 갔어? 그놈.”


 그것까지는 못 봤다는 뜻으로 페로는 날개를 으쓱하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모른다고? 괜찮아. 굳이 내가 찾지 않아도 다시 마주칠 것 같은 예감이 드니까.”


 페로가 입부리를 크게 쫘악 벌려 하품을 했다. 조그마한 데다 털 사이에 파묻혀 있어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부리를 시스가 장난스럽게 잡아 흔들었다. 어쩐 일로 페로는 순순히 당해 주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곁을 지키며 귀여운 모습으로 잠든 페로의 잔잔한 숨소리가 시스의 지친 마음을 위로했다. 덕분에 시스도 곧 단잠에 빠질 수 있었다. 


 시스는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대로 일찍 잠에서 깼다. 


 방 안의 사물들이 희미한 여명에 잠겨 있었다. 동그랗게 옹크려 자고 있는 페로의 흰 몸이 새벽의 빛깔에 물들어 푸르스름한 공처럼 보였다. 


 페로는 시스가 깨우기 전에 눈을 반짝 떴다. 그리고 처음 부화했을 때처럼 시스에게 달려들어 뒹굴뒹굴 어리광을 부렸다. 


 잠시 페로와 놀아준 시스가 페로를 안고 창가로 갔다. 시스가 창문을 열자 페로는 시스의 품을 벗어나 새벽노을이 드리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페로와 함께 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시스는 페로의 먹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바깥으로 날아간 페로가 어디까지 가는지 무얼 하는지도 역시 몰랐다. 


 시스가 페로에 대해 아는 것은 자신을 어미 혹은 주인으로 각인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 또 페로가 어디를 가든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것이었다. 


 “뭘 좀 먹어야겠어.”


 시스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문질렀다. 몹시 허기가 졌다. 


 어제 점심 식사는 결혼식 후 클레멘스 사제가 내어주는 신찬으로 때웠다. 그것이 몇 가지 과일과 익히지 않은 곡물 조금이었으니 제대로 된 한 끼라 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는 또 어떠했던가. 딱딱하고 엄정하게 자신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레이디 프레케스와 마주앉아 데세르를 기다렸다. 데세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레이디 프레케스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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