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Nov 06. 2024

18. 데세르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던 데세르가 서서히 현기증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손종을 집어 들었다. 


 시스가 헛간에 갇히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지금쯤 그녀는 추위와 분노와 절망 속에 시들어가고 있을 터였다. 


 손종을 흔드는 데세르의 손짓이 급박했다. 빨리 시스를 따뜻한 곳으로 데려와야 했다. 그리고 일단은 사과를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초상화에 얽힌 사연도 들려주어야 했다. 보여도 주어야 했다. 자신의 서재 벽을 가득 채운 초상화들을. 이 결혼이 단순한 정략이 아니라 운명적인 것임을.


 댕그랑댕그랑, 종소리는 신경질적인 울림으로 길게 이어졌다. 


 “공작님.”


 시종장 베리타스와 데세르의 개인 시종인 레투스가 동시에 뛰어 들어왔다. 


 “시종장은 그만 가서 쉬도록 하오. 레투는 남고.”


 베리타스는 허리를 숙이고 발소리도 내지 않고 물러갔다. 


 “분부하십시오, 공작님.”


 눈매가 쳐져서 우직하게 보이는 눈을 끔벅거리며 레투스가 머리를 조아렸다. 


 “어머니께 가서 헛간 열쇠를 받아 와라, 레투.”


 “네? 그, 그건 불가능한 분부인 것 같습니다. 공작님.”


 화들짝 놀란 레투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불가능? 레투, 너 제정신이야? 당장 튀어가서 받아오지 못해?”


 “아이구, 살려 주세요. 공작님.”


 레투스는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열쇠나 받아 와. 너하고 긴말 할 기분 아니니까.”


 “저어, 공작님. 저는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레투!”


 데세르가 노성을 질렀다. 찻잔을 움켜잡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잔을 집어 던지려다 가까스로 참아냈다. 


 울상을 지은 레투스가 청년 공작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무섭게 부릅뜬 공작님의 눈은 레투에게 ‘죽고 싶으냐?’고 묻고 있었다. 


 “마님께서 엄포를 놓으셨단 말입니다.”


 “엄포? 뭐라고 하셨는데?”


 레투스는 레이디 프레케스의 엄격한 표정을 흉내 내면서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읊었다. 


 “누구라도 나에게 헛간 열쇠를 달라는 말을 하면 그게 자의든 심부름이든 가리지 않고 항명의 죄를 물어 가장 무거운 벌로 다스리겠다.”


 데세르는 더 이상 레투스를 다그칠 수 없었다. 프레케스 가의 가주는 공작인 자신이었으나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끌어가는 것은 어머니였다. 


 이날 이때까지 시종이나 시녀, 하인과 하녀 등을 뽑아서 들이고 관리 감독하고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에 데세르는 관여한 적이 없었다. 다 어머니가 알아서 해왔다. 그러니 아랫사람들로서는 어머니를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몸을 일으키며 데세르의 말했다. 납작 숙이고 있던 레투스가 재바르게 새 의복을 가져와 시중을 들었다. 


 “가자.”


 “어, 어디를 가시려고요?”


 “열쇠 가지러.”


 “네? 잠, 잠깐만요. 공작님.”


 레투스가 다급하게 데세르의 앞을 막아섰다. 


 “너 오늘따라 안 하던 짓 많이 한다. 공작의 어머니는 무섭고 공작인 나는 안 무섭지?”


 전에 없이 살기가 묻어나는 어조였다. 위협적으로 부라리는 데세르의 눈을 레투는 감히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럴 리가요, 공작님. 제가 목숨이 두 개도 아니고.”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 쥐고 목을 움츠린 레투스는 어깨를 달달 떨었다. 


 “마님께서 공작님께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직접 오셔도 소용없다고, 열쇠는 절대로 안 내어 주신다고요.”


 “네가 그 말을 나에게 잘 전했다는 것은 내가 어머니께 알려 드리지. 겁이 나서 못 따라오겠거든 넌 그냥 여기 있어.”


 냉소를 떠올린 데세르가 비키라고 턱짓을 했다. 레투스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제가 이렇게 마님 말씀을 전해 올렸는데도 공작님께서 마님께 가시면 마님께서는 이 저택을 떠나시겠답니다. 그리고 떠나시기 전에 저를 데시데리 후작 미망인 댁으로 보내 버린다고 하셨어요.”


 털썩 주저앉아 데세르의 한쪽 다리를 부여안은 레투스가 울먹이면서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데세르는 걸음을 더 떼지 못하고 고뇌했다. 어머니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억지스러워 보일 정도로 시스에게 가혹하게 구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미망인께서 저만 보면요. 레투스, 나 따라 우리 집 가지 않을래? 가면 좋은 옷에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예뻐해 줄게, 이러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저는 가기 싫어요. 무서워요, 공작님. 제발요.”


 레투스의 신세한탄 따위는 데세르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데세르는 어머니와 시스 사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스스로가 싫어서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


 추위에 한참을 방치된 시스는 사지가 조금씩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손과 발은 시리다 못해 아팠고 입술과 혀조차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견디는 것은 의지의 문제라서 가능했지만 몸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제어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시스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는 이대로 버틸 작정이었다. 


 페로는 자주 살창 밖에 와서 눈빛과 날갯짓으로 시스의 의사를 물었다. 그때마다 시스는 괜찮다고 마음으로 답했다. 페로는 잘 알아들었고 시스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시스는 손과 발을 최대한 꼼지락거리며 재갈 속에서 뭉개지는 말들을 자꾸만 지껄였다. 정확히는 말이라기보다 욕지거리에 가까웠지만.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비루한 사기꾼. 돼먹지 못한 자식. 가증스러운 놈. 속여먹었으면 그만이지 어쭙잖게 구원의 기사 흉내를 내려 들어? 내가 언제가 됐든 너 꼭 잡는다. 뼈아픈 후회가 뭔지 알게 해 주마, 비열한 놈아.’


 신전에서 신랑인 척하는 그놈을 보았을 때 어쩌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던 걸 떠올리니 한층 더 짜증이 나고 열통이 터졌다. 


 발목이 묶인 채로 허공에 신경질적인 발길질까지 해대던 시스가 문득 동작을 멈췄다. 헛간으로 다가오는 급한 발소리가 있었다. 발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쿵 쿵 하는 충격음과 함께 헛간의 문이 뒤흔들렸다. 


이전 17화 17. 다피넬의 비밀스러운 웃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