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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Nov 01. 2024

16. 넌 누구지?


 라무스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것을 주시했다.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그것이 눈송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얗기는 하지만 눈송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다. 게다가 둥글고 포슬포슬한 몸에는 조그만 두 날개까지 돋아 있었다. 저 부실한 날개로도 날아다닐 수가 있다니. 감탄스러웠다.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문득 라무스는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결혼식을 위해 신전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보았었다. 신전의 상공을 활공하던, 둥그스름하고 몽실한 몸에 앙증맞은 날개가 달린 흰 새 같은 것. 


 그때 라무스는 그것이 신전을 감시라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저 새…… 같은 것은?’


 라무스가 아는 어떤 새와도 닮지 않은 새였다. 


 털이 많고 동실동실한 그 녀석은 라무스를 빤히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별안간 돌진해 왔다. 라무스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 


 녀석의 관심은 라무스에게 있지 않았다. 녀석은 살창 앞에서 날갯짓하며 잠시 머물더니 다시 날아올랐다. 그 행태가 마치 살창 안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내리는 눈송이 사이로 높이 날아 자취를 감춰 버렸다. 


 ‘혹시 레이디 시스의 전서매? 아니 전서구? 아니 전서 부엉이나 올빼미?’


 아니다. 분명 매도 비둘기도 아니고 부엉이나 올빼미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의 눈이나 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복슬복슬한 털에 파묻혀 있었던 것도 같은데 녀석이 작은 날개를 부산스럽게 치며 날아다니는 통에 제대로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희한한 새, 기묘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라무스는 살창 안 시스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시스는 눈을 뜨고 저쪽 살창을 통해 눈 내리는 바깥을 보고 있었다. 전서매인지 뭔지가 자신을 보고 간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언뜻 보기에 태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추위도 더 심해졌다. 라무스는 갈등에 빠졌다.


 ‘온기라고는 없는 건초 헛간에 마냥 저렇게 방치해 둬도 괜찮을까? 내가 나설 주제가 아니긴 한데…….’


  살창 밖으로 보이는 눈송이를 보던 시스는 깜짝 놀랐다. 날개 달린 동그란 솜뭉치 같은 것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페로!’


 재갈이 물려 있으니 마음속으로 이름을 불렀다. 페로가 시스의 마음을 읽은 듯이 가볍게 날개 치며 둥근 몸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작은 날개로 살창을 툭툭 건드렸다. 괜찮으냐고 묻는 것처럼. 


 ‘난 괜찮아. 근데 넌 어디 갔었니?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잖아.’


 이번에도 페로는 시스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페로가 다시 몸을 아래위로 몇 번 흔들었다. 그러고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 버렸다. 


 ‘하여간 한결같은 녀석이야. 십여 년째 변함없이 제멋대로네.’


 시스가 페로를 길렀고 심지어 부화도 시스의 품안에서 했다. 그런데 녀석은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주체적이었다. 


 페로가 시스를 따르고 의지하는 것은 분명했다. 다만 페로는 자유를 원했다. 제가 시스 곁에 있고 싶으면 있고 어디로든 가고 싶으면 훌쩍 가 버렸다. 물론 언제나 시스에게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내리는 눈 때문일까, 페로 때문일까. 


 시스는 십여 년 전에 잠시 들렀던 솜다리 여관을 오래간만에 떠올렸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되새겨 보던 시스는 궁금해졌다. 


 ‘그 아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제는 서로 마주친다 해도 모르는 채로 지나칠 것이다. 시간의 물결에 한참을 떠내려 왔을 뿐 아니라 애당초 이름도 얼굴도 모르니까. 


 시스는 허탈하고 쓸쓸한 한숨으로 감상적인 회상을 덮어 버렸다. 


 ‘재갈까지 물고 있자니 갑갑하고 불편해 죽겠는데 대체 언제까지 이 꼬락서니로 처박아 두겠다는 거지?’


 슬슬 치밀어 오르는 짜증 속에 시스는 이 속박과 감금을 어떤 식으로 벗어나는 것이 가장 나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냥 내 방식으로 이 결박을 풀고 살창의 나무살을 부수고 빠져나가?’


 결박당하면서 팔이 몸통에 고정되긴 했지만 두 손은 앞으로 묶여 있었다. 시스는 스타킹을 신으면서 발목 안쪽에 작은 칼날을 넣어 두었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더 쉬운 방법도 있었다. 정신감응으로 페로를 다시 불러 ‘나를 풀어줘’라고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럼 녀석은 나무 살창쯤은 가볍게 부수고 들어와 작지만 신통한 부리로 밧줄을 댕강댕강 잘라낼 것이다. 


 페로는 십 년이 넘도록 날개를 제외하고는 별로 자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페로가 평범한 새가 아님은 분명했다. 시스도 아직 녀석의 특별한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는 몰랐다. 사실은 페로가 정말 새가 맞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둘 다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아직은 그렇게 막 나갈 때가 아니야.’


 나중을 위해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차후 시스는 국왕을 찾아가 이 결혼의 무효를 소명할 작정이었다. 무효 주장의 근거는 당연히 신랑 바꿔치기 즉 사기 결혼이라는 점이다. 그때가 오면 프레케스 공작 가에서 당하는 이런 가혹한 처우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는 이 집에 오래 속해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받아들인 결혼이었다. 


 건초에 기대어 눕다시피 하여 상념에 잠겼던 시스가 돌연 등을 일으키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자물쇠를 여는 듯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곧 문이 열리더니 천과 후드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헛간으로 들어섰다. 사실 그는 벽 너머에서 갈등하던 라무스였다. 라무스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는 시스에게 다가와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부터 풀었다. 


 “넌 누구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지막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시스가 따져 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지의 남자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데세르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이 남자는 야위지도 않았고 아마도 격투와 검투로 단련되었을 탄탄한 체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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