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어!”
묶인 손목을 풀어주려는 라무스의 손길을 시스는 민첩하게 몸을 굴려 피해 버렸다. 그러고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이러는 목적이 뭐야?”
시스에게 목소리를 들킬세라 라무스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바쁜 손짓으로 시스의 의사를 물었다.
‘안 풀어줘도 된다고?’
“그래. 그러니까 재갈 다시 물려 놓고 꺼져. 알겠어?”
시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살창 밖에서 날갯짓 소리가 났다. 페로의 희고 둥근 몸이 살창에 닿을 듯 가까이 떠 있었다. 흰 털 사이로 블랙오팔 같은 두 눈이 이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라무스는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한 위협임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스에게 손짓말을 하여 확인했다.
‘진심이야?’
“뭘 자꾸 물어? 빨리 원래대로 해놓고 꺼지라는데.”
불쾌감이 배어나는 강경한 어조였다. 라무스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시스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저 여자도 나름의 속셈이 있겠지.
라무스는 던져 버렸던 재갈을 주워 시스의 입에 다시 물렸다. 대신 조금 느슨하게 묶었다.
헛간 문을 막 나서려다 말고 라무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스가 재갈을 문 채로 다급하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스가 한 말은 ‘혹시 너 그 대역 그놈?’이었다. 대강 알아들었지만 라무스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척 유유히 나가 버렸다.
자물쇠가 다시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시스는 이를 갈았다. 그놈이 틀림없었다. 가짜 노릇을 한 것보다 이제 와서 구원의 기사 노릇을 하려던 작태가 더 재수 없고 화나는 노릇이었다.
‘언제든 다시 마주치기만 해봐.’
그때는 그놈에게 가르쳐줄 심산이었다. 레이디 앙켑세라에게서 배운 ‘계산은 확실히’를.
*
“이렇게 느긋하게 계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까부터 초조한 기색으로 치맛자락을 말아 쥐었다 풀었다 하던 마르타가 슬그머니 본심을 꺼냈다.
다피넬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쓴웃음을 보이더니 바닥이 보이던 와인 병을 비우고 새 와인을 땄다.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면?”
“마이 레이디. 감히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한 말씀만 올려도 될까요?”
“알아, 마르타.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내가 시스에게 너무 혹독하게 굴고 있다는 말이겠지.”
속내를 읽혀 버린 마르타는 죄송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마르타가 아는 한 레이디 프레케스는 엄격한 주인이긴 해도 냉혹한 주인은 아니었다.
“그래 맞아. 시스도 잘못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처사는 분명 심했어. 통상적인 정도를 넘었어.”
“마이 레이디.”
마르타는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그러셨느냐는 눈빛으로 다피넬을 올려다보았다.
“마르타가 시스를 끌고 나가고 나서 나는 데세르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어. 그랬더니 데세르가, 내 아들이 뭐라고 했는지 한 번 알아맞혀 보겠나?”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마르타는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했다. 젊은 공작은 지금까지 어머니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실망했다더군.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어머니를 계속 존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더군.”
다피넬은 씁쓸한 낯빛으로 마르타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하고는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르타는 놀라 벌어진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안절부절 못했다. 놀라고 안타까운 심정이 표정과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공작님께서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시네요. 서운하셨겠습니다.”
“서운하지 않아. 나는 괜찮아. 아들이 자라면 어미 품을 벗어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마르타 말대로 오해일 뿐이니까.”
그러게 레이디 시스를 좀 너그러이 봐 주지 그러셨습니까. 마르타는 이 말을 감히 입에 담지는 못했다. 타는 속을 식혀줄 한 잔의 물과 함께 꿀꺽 목안으로 삼켰다.
공작님의 경사스러운 결혼식 날 밤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속상한 나머지 마르타는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레이디도, 젊은 공작님도, 레이디 시스도 마르타의 눈에는 다 가여웠다.
“그런데 말이야. 마르타의 주술이 왜 시스에게는 효력이 없었을까?”
마르타가 대단한 주술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깜냥 안에서는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번 일을 삐끗한 것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결국은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그것 참. 모를 일이란 말이지. 그러나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수밖에.”
다피넬이 마르타를 향해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뜻 모를 말을 하면서 웃는 주인을 보며 마르타는 골똘한 생각에 빠졌다. 위기를 기회로…… 라니. 마르타는 머릿속으로 일의 경위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짚었다.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는 마르타의 손이 허공에서 까딱거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그 손으로 붙잡겠다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이제야 알았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그러니까 일부러 레이디 시스에게 심한 처분을 내리신 거군요?”
다피넬은 부정하지 않았다. 굳어 있던 마르타의 얼굴이 얼마간 혈색을 되찾았다.
“내가 이 한겨울에 며느리를 결박하여 헛간에 가두었지. 이제 내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헛간의 문을 열어서는 안 되고. 자, 마르타. 지금 누가 가장 괴로울까?”
“그야, 아무래도 재갈을 물고 팔이 묶인 채 추운 헛간에 갇힌 레이디 시스가…….”
“신체의 고통이라면 그럴 테지. 그런데, 마음의 고통이라면?”
“마음의 고통……이라면?”
되물으면서 깨달은 마르타가 굵은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 듯한 표정으로 크게 탄식했다.
“아아, 우리 공작님. 가슴이 바작바작 타들어 가고 있으실 텐데.”
“그렇겠지. 시스에 대한 애정이 진심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고.”
동의를 구하듯이 다피넬이 마르타를 향해 눈썹을 올렸다.
마르타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다 또 다른 걱정을 떠올렸다. 그런데 우리 공작님, 가뜩이나 병약하신 분이 저리 애를 태우셔도 되는 걸까. 마르타는 더럭 겁이 났다. 결혼을 계기로 호전을 보이던 공작님의 병세가 더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