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는 격렬히 저항했으나 결박되어 있는 탓에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체격과 살집이 좋은 마르타는 완력도 보통은 넘었다. 마르타가 시스를 주저앉혀 재갈을 물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화가 치민 시스는 분노에 찬 항의를 쏟아냈지만 그 소리는 재갈 안에서 뭉그러져 버렸다. 악에 받친 몸부림으로도 어깨를 누르는 마르타를 뿌리치지 못했고.
“이제 우리는 가족이니 편하게 시스라고 부르겠다. 시스, 가여운 시스. 공연히 헛심 쓰지 말거라. 그래 봐야 기운만 빠지고 너만 손해란다.”
다피넬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시스의 눈이 다피넬을 노려보았다.
“어른 앞에서 눈을 그렇게 뜨면 쓰나. 사실상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녀인데 예법이 그리 형편없어서야 원.”
다피넬이 허리를 숙여 손으로 시스의 뺨을 쓸며 혀를 찼다. 시스는 고개를 홱 돌려 다피넬의 손길을 피했다. 그녀의 신랄한 반박은 고작 날카로운 눈빛과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하는 아우성에 불과했다.
‘신랑을 바꿔치기 하고, 잠에 빠지는 약 같은 걸 먹이고, 잠든 사람을 어찌해 보려 하고. 이거 다 당신네들이 저지른 짓이잖아. 난 그저 위급한 순간에 스스로를 지키려다 보니 좀 과격한 언행이 튀어나왔을 뿐이고.’
“시스. 네가 믿을지는 모르겠다만 애초에 나는 엄혹한 시어머니가 될 생각은 없었단다. 난 내 아들과 맺어진 너를 여신의 선물이라고 여겼었다. 너를 아끼고 사랑할 작정이었어. 다만, 그건 네가 내 아들에게 좋은 아내일 때 얘기겠지?”
자세를 바로 한 다피넬이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느리게 말했다. 듣고 있던 시스가 눈을 부릅뜨고 도리질을 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워요. 내가 여신의 발아래에 서서 결혼 서약을 한 남자는 당신 아들이 아니었잖아!’
“우리 데세르 공작님의 아내가 이렇게나 경우 없고 과격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어른으로서 엄하게 버릇을 가르칠 수밖에.”
시스는 코웃음을 쳤다. 경우가 없어? 과격해? 누가 할 소리.
“마르타.”
한숨 섞인 소리로 다피넬이 부르자 마르타가 냉큼 다가섰다.
“예,”
“시스를 건초 저장하는 헛간에 가둬.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하고. 만약 누군가가 헛간 문을 열고 시스를 데리고 나온다면 이 저택에서 지금껏 행해진 적 없는 엄벌에 처할 테니 모두에게 명심시키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헛간 문 잘 잠그고 열쇠는 바로 나에게 가져와.”
말을 마친 다피넬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시스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마르타에게 이끌려 헛간으로 갔다. 마르타는 높다랗게 쌓인 건초더미 앞의 건초 뭉치 위에 시스를 앉혔다.
“레이디 나이아시스. 괴로우시겠지만 조금만 참고 계세요. 우리 레이디 프레케스께서 저리 쌀쌀맞아 보이셔도 사실은 그리 모진 분은 아니시랍니다.”
등잔에 불을 밝히면서 마르타가 말했다. 듣는 둥 마는 둥 시스는 건초 더미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잠시 시스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마르타가 헛간을 나갔다.
끼이익 나무문 닫히는 소리에 이어 자물통을 채우는 쇳소리가 시스의 신경을 긁었다. 시스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이내 짜증을 억누르고 자신이 당하는 부당함을, 자신이 처한 난국을 곰곰이 분석해 보려 애썼다.
결혼을 피하지는 못해도 어떻게든 원만히 정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는데, 막상 프레케스 공작 가에 들어오고 보니 모든 일이 예상을 벗어난 방향으로 흘러갔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심하게 대하는 거지? 다피넬 프레케스의 의도는 뭐지?
한편 마르타가 시스를 데리고 헛간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던 라무스는 창고 지붕을 떠나 헛간 지붕으로 옮겨갔다.
두꺼운 나무로 된 헛간 출입문을 잠근 마르타가 열쇠를 들고 본채로 돌아가는 것을 라무스는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본채 안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려 라무스는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헛간 벽에는 몇 개의 살창이 뚫려 있었다. 세로로 죽죽 대어 놓은 나무살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통풍창이었다.
살창을 차례로 살피던 라무스는 시스의 옆모습이 비껴 보이는 살창 옆으로 가서 벽에 붙어 섰다.
‘일단은 레이디 프레케스의 승, 이라고 해야 하나. 레이디 나이아시스가 저렇게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으니.’
가벼운 냉소를 띤 라무스가 살창 사이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등잔불에 비친 시스의 낯빛이 피곤에 젖은 듯 보였다. 그녀는 등 뒤의 건초 더미에 비스듬히 등허리와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것이 아닌 건 확실했다. 이따금씩 인상을 쓰며 한숨을 쉬고 있었으니까.
살창에서 시선을 뗀 라무스는 팔짱을 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내 흐렸던 하늘에서 희끗희끗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헛간 처마 아래에서 눈을 피하며 라무스는 안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기척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하긴, 혼자 발버둥을 쳐 봐야 지칠 뿐이지. 아니, 어쩌면 이 추위에 저러고 가만히 있는 게 더 나쁜 선택인가. 계속 저렇게 두면 한기가 들어 몸이 얼어 버리는 거 아닌가. 레이디 프레케스는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까지 가혹하게 굴까?’
원래 라무스는 타인의 일에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여기에서 시스의 동태를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라무스는 자신의 예외적인 행동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논리가 필요했다. 그는 이내 논리를 찾아냈다. 혹은 논리를 가장한 변명을.
죄책감이었다. 레이디 나이아시스가 저 지경이 된 것에는 신랑 대역을 했던 자신의 책임도 있다는.
어스름한 허공을 꽃잎처럼 수놓는 흰 눈을 올려다보던 라무스는 이상한 눈송이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 커다란 눈송이였다. 그것은 저 높은 곳에서 이쪽을 향해 원을 그리며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