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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Oct 28. 2024

14. 다피넬 대 시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스의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시스는 순식간에 데세르의 팔을 꺾고 그를 밀쳐 버렸다. 그러고는 마실 물이 든 물병을 들어 데세르의 얼굴에 확 퍼부었다. 


 비틀거리던 와중에 물벼락까지 맞은 데세르는 벽을 짚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한꺼번에 엄습하는 여러 감정으로 그는 혼란스러웠다. 수치심, 당혹감, 노여움, 불쾌감, 놀라움……. 한 가지 확실한 건 시스와의 사이가 단단히 꼬여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그 즉시로…….”


 시스의 살벌한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잇문이 벌컥 열렸다. 건장한 시종들이 득달같이 뛰어들어 시스의 팔과 몸을 묶어 버렸다. 


 뒤에서 보고 있던 다피넬이 시스의 앞으로 걸어왔다. 시녀장 마르타가 그녀를 뒤따랐다. 


 다피넬의 과격한 개입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시스는 화를 낼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나오는 것은 오히려 쓴웃음이었다. 시스는 등을 꼿꼿이 펴고 다피넬과 마주섰다. 


 “내 며느리 되는 레이디 나이아시스가 활달하고 호탕하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이제 보니 포악한 면모까지 갖추었구나. 앞으로 내가 가르칠 것이 많겠다.”


 화를 억누르며 다피넬이 비꼬았다. 그 사이 마르타는 수건으로 데세르의 얼굴이며 머리에 묻은 물을 조심스레 닦아내고 있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답니까? 당장 풀어 주세요.”


 시스가 냉철하게 요구했다. 


 “우선은 윗사람에 대한 공손한 태도부터 가르치는 것이 순서겠구나.”


 다피넬이 눈짓하자 마르타가 시스의 무릎 뒤를 툭 찼다. 


 시스는 본의 아니게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러나 두렵거나 겁먹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분한 눈으로 시종들을 노려보았다. 시종들은 시스의 눈을 피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다피넬의 매서운 눈빛이 마르타를 향했다. 진저티에 제대로 손을 쓴 게 맞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마르타는 표정으로만 자신은 억울하다고, 틀림없었다고 호소했다. 마르타야말로 어안이 벙벙했다. 


 진저티에 사용한 약과 걸었던 주술은 틀림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 티를 마셨다면 아침까지 누가 팔이나 다리 하나를 베어 가도 모르게 푹 잤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변명의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가는 레이디 프레케스와 자신이 공모했다고 공공연히 까발리는 셈이 될 터였다. 하여 마르타는 지금 입은 있으되 말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창고의 지붕 위에서 보고 있던 라무스는 실소했다.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레이디 프레케스의 간섭은 도가 지나쳤다. 


 어쨌거나 라무스는 제 삼자의 입장이다 보니 똑같이 기세등등한 두 여자의 대치가 제법 흥미진진하기도 했다. 저 웃지 못할 소동이 과연 어떤 식으로 매듭지어질 것인지. 


 “이 결박, 당장 풀라고 하세요.”


 시스가 한 번 더 단호하게 요구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싸늘했다. 


 다피넬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매서운 눈으로 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수습해야 할지 고심하느라 바빴다. 


 시스는 다피넬이 미리 알아보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뻣뻣하고 제멋대로였다. 이대로 그냥 풀어 준다면 또 다시 데세르에게 사나운 태도를 보일 터였다. 그 꼴을 볼 수는 없었다. 


 저 아이에게는 자제력을 기르고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다피넬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화를 내야 할 쪽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요? 제대로 잘잘못을 따지면 누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까요? 잘 아실 텐데요. 어서 풀어요, 이거!”


 결박당한 몸을 거칠게 비틀면서 시스가 말했다. 결국 새된 고성을 질렀다. 


 “네가 내 아들인 공작과 결혼한 이상 공작은 네 남편이자 주군이야. 그런데 너, 방금 공작에게 무슨 짓을 했지? 공작의 성품이 관대한 것에 감사하렴. 우리 공작께서 난폭한 성품이었다면 지금 넌 어떻게 됐을까?”


 방금 전 아들이 당한 짓을 생각하면 다피넬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어떻게 지켜온 아들인데. 만지는 손길조차 조심스러웠고, 건네는 말 한마디조차 함부로 한 적 없어. 그런 내 아들에게 네가 감히 손찌검을, 감히.’


 “결혼이요? 저 남자와? 제가 말입니까?”


 입술 끝에 냉소를 매단 시스가 딱딱 끊어서 묻더니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복도로 물러나 등을 돌리고 있던 시종들이 소리 없이 술렁댔다. 저 레이디 나이아시스라는 분은 혹시 정신이 살짝 나간 게 아닐까? 시종들이 슬쩍슬쩍 교환하는 눈짓에는 이런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전에 공작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르타.”


 다피넬이 눈짓하자 마르타가 복도로 나가 시종들을 물러가게 했다. 


 “어머니. 그만 나이아시스를…….”


 다피넬과 시스 사이를 중재하고 싶었던 데세르가 나섰다.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돌발적이고 날카로운 현기증이 찾아온 탓이었다. 


 “데세르, 아니 타키툼의 공작님.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우리 공작님은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군요. 너무 걱정 말고.”


 다피넬이 데세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들의 등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떠밀었다. 


 순순히 사잇문을 향해 걸어가는 데세르를 보며 다피넬은 아들이 순순히 자신의 뜻을 수용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건 다피넬의 오판이었다. 


 기실 데세르는 속히 이 방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시스가 보는 앞에서 쓰러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잇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다피넬이 시스를 향해 돌아섰다. 


 시스는 자신에게 바늘처럼 내리꽂히는 다피넬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시스는 여전히 상체가 결박된 채로 바닥으로부터 무릎을 차례차례 세워 일어섰다. 


 “일어나도 좋다고 한 적 없다. 어딜 감히 멋대로……”


 꾸짖던 다피넬의 말문이 갑자기 막혔다.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시스가 꺼내서는 안 될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이 결혼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직전에 마르타가 시스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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