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가죽부대를 세게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시스의 상태가 이상했다. 단순한 잠에 빠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비록 저 둘이 결혼을 한 사이라도 저건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닌가.
화인지 짜증인지 모를 미묘한 감정이 라무스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
시스가 잠의 습격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눕히던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미심쩍은 장면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아까 시녀장이라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가져다 줬던 진저티, 입에 잘 맞아 한 컵을 더 청해서 마셨던 그것.
진저티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어떤 저항도 무의미한 해일처럼 덮쳐오는 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기 바로 직전 시스는 사력을 다해 마음의 소리로 외쳤다.
‘백작 부인. 거기 있나요? 백작 부인!’
‘어머머 웬일이야? 나를 그렇게 제대로 불러 주다니?’
시스의 꿈속. 교태 어린 목소리가 빈정거린다. 뒤이어 새치름하니 젊은 레이디가 오색 안개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백작의 부인이라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백작 부인이라는 건 순전히 그녀의 주장이다. 그녀는 꿈에서 종종 마주치는 시스에게 고집을 부리곤 했다. 백작 부인이라고 부르라고.
그러나 시스가 그녀를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준 건 방금 전이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시스는 그녀를 꿈 마녀라고 불러 왔다.
‘백작 부인의 도움이 필요해.’
‘호호, 꼬박꼬박 백작 부인이라고 부르네? 흥! 사정이 많이 급하신가 봐, 레이디?’
‘그래, 급해. 도와줘.’
‘싫다면?’
백작 부인이라고 불리고 싶은 꿈마녀가 신이 나서 느물거린다.
‘그러지 말고 좀 도와 줘. 이렇게 잠들어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단 말이야.’
‘무슨 일을 당하긴 무슨 일을 당해? 초야를 치르게 되겠지. 새 신랑 새 신부가 초야를 치르는 건 당연한 건데 왜?’
시스가 꿈속에서 꿈 마녀를 만나면 꿈속의 그녀는 저쪽 현실의 시스를 둘러싼 상황을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
백작 부인은 킥킥 웃으며 얼굴을 붉힌다. 두 손으로 뺨을 감싸더니 부끄럽다는 듯 어깨까지 움츠린다. 시스를 놀려 먹는 것이 꽤나 재미있는 모양이다.
반면 시스는 다급하고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알면서 이러는 거지? 신랑이 바뀌었단 말이야. 아니, 신랑이 안 바뀌었다고 해도 나는 초야니 뭐니 그런 건 전혀 관심 없고. 꿈 마녀, 아니 아니 백작 부인도 잘 알잖아.’
꿈 마녀라는 말이 워낙 입에 붙어서 시스는 순간적으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시스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손으로 찰싹 때렸다. 하지만 솔직히 시스의 눈에 비치는 그녀는 아무리 보아도 기품 있는 레이디는 아니었다. 적잖이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띠었으니까.
‘도와주면, 넌 나한테 뭘 해줄 거지?’
그녀가 검지손가락으로 시스의 이마를 장난스럽게 톡 친다.
‘다시는 꿈 마녀라고 안 부를게. 앞으로는 꼭꼭 백작 부인이나 레이디라고 불러 줄게.’
‘에게…… 고작? 마음이 별로 동하지를 않는데?’
백작 부인 즉 꿈 마녀는 슬쩍 돌아서는 시늉을 한다.
‘이봐, 꿈 마녀. 아직 흥정 안 끝났거든?’
시스는 극약 처방을 꺼내 들기로 한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다.
‘또 꿈 마녀라고 하네. 일단 됐고, 흥정인지 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이번엔 뭔가 내가 혹할 만한 걸 내놓겠다는 거겠지?’
토라진 표정으로 시스를 흘겨보던 꿈 마녀가 다시 다가와 시스와 마주선다.
‘지금 바로 나를 잠에서 깨워주지 않으면.’
시스의 어조는 얼음물을 끼얹는 것처럼 냉정하다.
‘않으면?’
‘네가 네 아이 꿈에 들어가 같이 놀 때 확 네 본모습을 드러내 버릴 거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건 너도 알지?’
꿈 마녀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의 본모습 즉 죽던 당시의 모습은 실로 참혹했다.
이 꿈 마녀는 생을 마감할 때 절벽에서 떨어졌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암벽에 얼굴이 부딪쳐 짓이겨지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숨이 끊어지던 순간에는 벼락에 꺾인 나무에 배를 찔리고 베였으니 내장이 밖으로 비어져 나오기까지 했다.
‘안 돼에에! 싫어! 싫어!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꿈 마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댄다. 머리를 감싼 두 손이 귀족 부인의 손이라기에는 너무 거칠다.
‘그러지 마. 세상 어떤 보석보다 찬란하고 귀한 내 아이에게 그런 무섭고 끔찍한 몰골을 보여 줄 순 없어.’
꿈 마녀는 울면서 진저리친다.
그 모습을 보는 시스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너무 심했다 싶어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하게 꿈 마녀의 아픔을 달래줄 겨를이 없다.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지금 바로 잠 깨워주면 그런 일은 없어. 실은 나도 그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빨리! 빨리 나 좀 잠에서 깨워줘!’
시스는 천진무구한 아이에게 잔혹한 악몽을 보여줄 만큼 모질거나 막되지 않았다. 꿈 마녀에 대해서도 겉으로나 어기대고 티격태격했지 속에 품은 진심은 연민이다.
‘안 한다니까, 절대로 안 안할게. 맹세해, 맹세한다고.’
절박해진 시스가 빠른 말로 덧붙인다.
‘진짜지? 맹세한 거다?’
시스가 세차고 조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꿈 마녀는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긴다. 꿈 공간에 금이 쩍쩍 간다. 꿈 마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중얼거린다.
‘안 보면 궁금하고 막상 보면 못마땅한 저것은 도대체 정체가 뭐지?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게 분명한데.’
꿈이 와장창창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시스는 잠에서 빠져나왔다.
“……!”
시스가 눈을 번쩍 뜬 것은 멈칫거리던 데세르의 손끝이 이제 막 시스의 석류 같은 입술에 닿으려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