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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Oct 23. 2024

12. 신방을 엿보는 눈


 잠든 그녀의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나비의 날개처럼 뺨에서 하늘거렸다. 꿈이라도 꾸는 건지 그녀의 미간과 눈꺼풀이 가끔씩 옴지락댔다. 


 이 순간 그녀는 한없이 아름답고 철저히 무방비했다. 


 어머니의 강요를 방패삼아 시스를 가지고 싶은 욕망이 데세르를 집어삼킬 듯 타올랐다.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나갔다. 그 손이 시스의 이마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망설이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꽃잎 같은 뺨을 스쳤다. 이어서 알맞게 오똑한 콧날을 서서히 더듬어 내려갔다. 그녀의 피부는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데세르의 손은 그녀의 붉고 도톰한 입술 앞에서 머뭇거리다 차마 닿지 못하고 와인 병으로 향했다. 가슴속이 타는 듯한 열기로 가득했다. 


 *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왔다 불어가는 바람을 나무는 잡지 않았다.

 어딘가에 바람을 잡고 싶어 손을 뻗는 이가 있다면 그는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일 테다. 


 라무스는 자신이 머물게 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창고에 딸린 꽤 널찍한 방이었다. 열어 둔 창문으로 겨울바람이 제멋대로 드나들었지만 그대로 좋았다.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화이트 와인을 병째 마시던 라무스는 자신의 뇌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막을 수도 없었고. 


 바람이 라무스의 청흑색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흐트러뜨렸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와인을 목구멍에 콸콸 들이붓다시피 들이켰다. 


 그의 뇌리는 자꾸만 결혼식 장면을 떠올렸다. 


 새벽의 여신을 모신 장엄한 석조 신전과 제단 위의 여신상 그리고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얇은 웨딩 베일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오히려 신비를 덧입힌 셈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새 신부다운 기대나 설렘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은 얼굴과 서슬 푸른 눈빛에 쌩하니 냉기가 돌았다. 언젠가 그것과 비슷한 눈빛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인상적이었다.


 담담하게 결혼을 서약하던 목소리에도 냉소가 서려 있었다. 보는 사람에게 시린 기운을 주는 여자였다. 


 “아름답지만 차갑고 강인한, 아이스 플라워.”


 문득 라무스는 기억해냈다. 이 말을 했던 소녀를. 신전에서 본 나이아시스의 얼음 같은 눈빛은 그 소녀와 닮아 있었다. 


 지난날 라무스는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소녀에 대한 이미지는 과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배. 소녀의 희고 귀여운 손이 던져주었던, 잘 익어 향긋했던 배 한 알. 


 어느새 와인 병이 비어 버렸다. 병을 털어 마신 라무스는 몸을 일으켰다. 어울리지 않는 감상 따위는 집어치우고 와인 저장고에나 다녀오자 싶었다. 


 프레케스 가의 화이트 와인은 무척 맛있었다. 레이디 프레케스는 와인이라면 지하 저장고에서 마음껏 갖다 마셔도 된다고 했다. 


 “이봐요.”


 열어 둔 창문 쪽에서 웃음 묻은 목소리가 불렀다. 라무스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게 필요한 거죠?”


 젊은 아가씨가 양손에 든 와인 병을 흔들어 보였다. 풍성한 금발은 땋아 틀어 올렸고 단순하지만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누구지?”


 “넬리사. 레이디 프레케스의 시녀죠. 아버지가 와이너리를 하는데 귀족 가의 예의범절을 배워 두라고 이 댁에 시녀로 보냈어요.”


 넬리사는 매혹적인 자태로 연신 생글거렸지만 라무스는 꽤나 붙임성 있는 성격이 모양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추임새였다. 


 “들어갈게요.”


 와인 병을 창틀에 놓고 넬리사가 치마를 걷어 올리더니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거침없고 겁도 없는 아가씨였다. 


 “뭐하는 짓이지?”


 창문 옆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고 팔짱을 낀 라무스가 꾸짖는 투로 말했다. 


 이미 넬리사는 허름한 나무 테이블에 앉아 와인 병을 입술에 대고 기울이고 있었다. 넬리사가 오라고 손짓했다. 라무스는 무시했다. 


 “나, 처음 봤을 때부터 그쪽이 마음에 들었어요. 아, 오해는 말아요. 아무한테나 이럴 만큼 단정치 못한 여자는 아니니까.”


 라무스는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나이에 비해서는 세상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겪은 라무스였기에 한눈에 알았다. 넬리사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더욱 그녀에게 동조해줄 수 없었다. 라무스는 부잣집 아가씨가 부리는 순진한 객기를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울 만큼 타락하지 않았으니까. 


 “진짠데?”


 “뭐가 진짜라는 거지?”


 “아무한테나 이러지 않는다는 거, 그쪽이 마음에 든다는 거.”


 넬리사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유혹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엽지만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는 내 취향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라무스가 한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너무 그러지 말고 이리 와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얘기나 해요, 우리. 나,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넬리사는 기쁘게 웃었으나 그 웃음은 이내 실망감 속으로 사라졌다. 라무스가 창을 훌쩍 뛰어넘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라무스는 창고의 높은 지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와인을 가득 담은 가죽부대와 함께였다. 


 가죽부대를 열어 와인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던 라무스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굴뚝을 살짝 비껴서 저만치에 창문이 활짝 열린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하필 오늘밤 신방이 차려진 시스의 방 창문이었다. 남의 침실 엿보기 좋아하는 악취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면 자리를 뜨는 것이 옳았다. 


 다른 데로 옮겨가기 위해 일어나던 라무스가 문득 도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방 안 정경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탓이었다. 


 시스가 테이블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굴뚝에 의지해 자신을 은폐한 라무스는 시스 쪽을 주의 깊게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데세르가 보였다. 데세르가 머뭇거리면서도 천천히 시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는데도 시스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무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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