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어머니께서…….
개운치 못한 의혹이 데세르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오히려 의혹은 짙어졌다.
신전에 가짜 신랑도 내보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라면 신랑이 바뀐 사실에 화를 낼 시스에게 미리 손을 쓰고도 남았다.
“지금 이 상황, 어머니께서 의도하신 겁니까?”
사잇문으로 다가간 데세르가 물었다.
저쪽에서 다피넬이 문을 열고 아들과 마주섰다. 어머니의 의지와 아들의 감정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무슨 소리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어서 초야부터 치르도록 해.”
다피넬은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데세르의 판단은 어머니가 시스에게 무언가 수를 쓴 게 분명하다는 쪽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어머니!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저 아이는 네 신부다. 여신의 발아래에서 네 이름에 대고 평생 아내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서약했어.”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다피넬의 말은 강경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나이아시스와 더불어 신전의 사제 앞에 섰던 건…….”
“너를 잘 알고 있는 사제가 아무런 이의 없이 네 이름으로 결혼을 주관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텐데?”
타키툼의 아우로라 신전을 지키는 클레멘스 사제는 다피넬의 오랜 맹우였다. 이제 클레멘스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날 결혼식을 올린 신랑은 데세르라고 증언할 것이다.
클레멘스에 대한 심판은 그녀가 새벽의 여신에게 돌아가는 그날까지 미뤄질 것이다. 그녀는 여신에게서 직접 심판 받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어차피 저 아이는 돌아갈 곳도 없다. 공작 부인이 죽고 새 공작 부인이 들어온 이래로 저 아이가 글라키에사 가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알잖니.”
물론 데세르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이아시스가 글라키에사 공작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까지. 물론 이것은 극비 사항이었지만 다피넬의 정보력은 그만큼 막강했다.
다피넬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나이아시스는 국왕령인 페르베아투 땅에서 출생했다. 부모에 대한 정확한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왕가의 방계 혈족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다피넬은 시스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간을 주세요, 어머니. 이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시간을 가지고 나이아시스를 이해시키고 설득하겠습니다.”
“아니, 절대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밤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했단다. 마르타가.”
마르타는 프레케스 가의 시녀장이었고 주술사였다. 그녀가 주술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다피넬과 데세르 두 사람뿐이었지만.
오늘밤이 가장 좋은 시기라는 마르타의 말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오늘밤 초야를 치를 경우 잉태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오늘 오후로 접어들면서 데세르의 병세가 전에 없는 호전을 보이고 있다는 것.
“역시 어머니와 마르타가 손을 쓴 것이로군요.”
다피넬도 더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데세르는 자신의 병든 몸이 원망스러웠다. 하필 결혼식이 있는 날 아침에 갑작스레 의식을 놓치다니.
데세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결혼식 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였다. 몸은 이상할 정도로 가볍고 기분도 상쾌했다. 그러나 결혼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신랑 대역을 썼다는 말을 들은 데세르는 불 같이 화를 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어머니인 다피넬의 설명에도 일리는 있었다.
데세르와 시스의 결혼식은 이미 두 차례나 연기된 적이 있었다. 결혼을 원치 않는 시스는 최근 몇 달 동안 보름이 멀다 하고 국왕에게 편지를 썼다. 결혼 하사를 철회해 달라고 조르는 편지였다.
게다가 국왕령인 페르베아투의 젊은 부호 코르다 자작이 시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코르다 자작의 물량 공세에 국왕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시스의 편지 따위는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다피넬은 잘 알았다. 그러나 코르다 자작의 물량 공세와 국왕과 왕비의 사치스러운 성향은 다피넬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시스를 수행하고 온 이들은 국왕의 명을 받은 경호 기사 허버드와 글라키에사 공작 가의 시녀장 리네아였다.
그들이 시스에게 충성심은커녕 동정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일부러 다피넬의 앞에서 코르다 자작을 들먹였다. 계산속이 빤했다.
다피넬은 그들의 탐욕 주머니를 적당해 채워 주는 한편 순조롭고 완벽한 결혼식을 위해 매사에 만전을 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결혼식을 미루자고 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신랑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어쩌면 그들은 데세르의 건강을 빌미 삼아 시스를 페르베아투의 카푸로 데려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이 결혼은 완전히 파기되고 코르다 자작이 시스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였다.
다피넬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정된 시각에 결혼식이 거행되게 만들어야 했다. 신랑 대역을 쓰는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 다행히 허버드와 리네아는 데세르의 얼굴을 몰랐다.
“데세르, 우리 공작님. 지금은 복잡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라 신방에 든 신랑의 마땅한 권리를 행사할 때란다. 결국 다 괜찮아질 게다. 아기가 들어서면 나이아시스도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수월하게 우리에게 적응하고 정을 붙이게 될 거다.”
부드럽지만 거역하지 못할 위엄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한 다피넬이 데세르를 시스 쪽으로 돌려세웠다. 데세르는 깊은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쓰러져 있는 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길게 뻗은 한 팔을 옆으로 베고 잠에 빠져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등황빛으로 반짝였다. 감은 눈 아래 드리운 속눈썹의 그늘과 장밋빛 입술에 고혹미가 서려 있었다.
유혹이 데세르를 시험이라도 하듯 엄습했다. 데세르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저 아이를 좀 보렴. 얼마나 사랑스러우냐.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공작님의 신부지. 초야는 우리 공작님의 권리이자 의무고.”
다피넬이 은근하게 속삭이고는 사잇문을 나갔다.
“내 신부, 내 권리…….”
테이블 앞으로 돌아온 데세르가 시스를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