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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Oct 16. 2024

9. 거짓된 결혼


 “거짓 결혼식이라니. 라무스 라디우스, 말을 가려 하시오. 나는 타키툼의 젊은 공작님인 데세르티온 프레케스 공의 결혼식을 기쁜 마음으로 주관할 것이오. 예정된 시각에, 여신의 발아래에서, 신성한 아우로라의 이름으로.”


 두 여자에게 완전히 질렸다는 듯 라무스는 팔짱을 끼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면 가는 데까지 가 보는 수밖에. 


 “신랑 측 참관인이야 두 분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고, 신부 측 참관인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들은 어찌하실 겁니까?”


 “아, 그건 염려할 바도 못 되지.”


 다피넬이 받아쳤다. 지끈거리던 골치가 싹 나은 듯 시원한 목소리였다. 


 “신부를 따라온 수행원이라고는 경호 기사 한 명과 시녀장 이렇게 둘뿐인데 그들 역시 내 아들의 얼굴을 모르지. 또 마침 내 아들의 머리카락 색도 어두운 색이야. 라무스 자네와는 좀 다르게 짙은 갈색이기는 하지만.”


 이어 클레멘스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얹었다. 


 “먹구름이 두껍게 끼어서 날이 많이 흐리고 신전 안은 어둑하겠지. 촛불을 밝히겠지만 신전 밖에서 참관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다 같은 어두운 색 머리칼로 보일 걸.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 둘은 결혼식 참관이 끝나는 즉시 포르미두사로 돌아갈 예정이라던데.”


 라무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 정도의 이중성과 배포라면 가히 잘나가는 사제의 자격이 있다고 해야 하는 거겠지. 


 *


 샹들리에의 불꽃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림자가 흔들렸다. 

 어쩌면 진정으로 흔들리고 있는 건 불꽃보다 그림자보다 누군가의 삶이리라.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흩뿌리는 빛은 부드러우면서 찬란했다. 침대에 펼쳐진 상앗빛 새틴 이불이 희붐한 광택을 발했다. 


 흰 레이스 테이블보가 덮인 원탁과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화이트와인 그리고 투명한 잔. 그것들을 앞에 두고 앉은 백합 같은 처녀, 그녀의 젊고 싱그러운 몸을 감싼 순백의 웨딩 베일과 드레스. 


 정결하고 고상한 초야의 침실 정경이었다. 단 하나, 신랑의 부재를 예외로 친다면. 


 얌전히 앉아 있던 신부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민첩한 동작으로 창문을 열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계절은 겨울이지만 실내는 꽤 따뜻했다. 바닥과 벽의 공간으로 따뜻한 공기를 지나가게 하는 난방 시스템을 갖춘 저택다웠다. 


 추위를 별로 타지 않는 시스는 덥고 갑갑했다. 창문을 열어젖히니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나직이 읊조리는 소리가 사잇문 쪽에서 들려왔다. 살짝 감격에 겨운 듯한 목소리였다. 


 방과 방을 연결하는 사잇문은 시스의 뒤쪽에 있었다. 시스는 돌아보거나 대답하지 않고 학습된 다소곳함과 인내를 시늉했다. 


 사실 시스는 수줍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저 불편하고 어색할 뿐이었다. 


 온몸을 휘감은 거추장스러운 치장 그러니까 베일이며 장신구들을 훌훌 걷어내 버리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하루 종일 온순하고 우아한 신부인 척 이 고역을 꾹 참아야만 했던 심경을 표현하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 음절로 족했다. 


 죽. 을. 맛. 


 ‘재깍 이리로 와서 이 거북한 것들이나 좀 벗어 버리게 해줄 것이지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지?’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시스는 지그시 눌러 목 아래로 삼켰다. 


 ‘혹시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가?’


 은근한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며 시스는 설핏 웃었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


 신랑의 용모를 떠올리자니 고개가 살짝 갸웃거려졌다. 시스는 결혼식을 올릴 때에야 그를 처음 보았다. 그는 시스가 들었던 소문과는 딴판으로 헌칠한 미청년이었다. 


 결혼이 결정된 뒤로 암암리에 떠돌다 시스의 귀에까지 닿은 소문은 심란한 것이었다. 


 신랑이 하자가 있다더라. 지병이 있어 오래 살기는 글렀다더라. 이미 골수에 병이 깊어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들다더라. 레이디 시스가 청춘 미망인 신세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런데 신전의 사제 앞에서 마주한 신랑은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곧은 다리와 등, 총명하고 우수가 깃든 눈, 강단 있어 보이는 콧날. 진중해 보이지만 저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단정한 입매. 


 다만 한 가지. 


 그의 얼굴에도 시스가 그러한 만큼이나 표정이 없었다. 일체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낯빛. 솔직히 시스는 그 낯빛이 오히려 반가웠다. 


 ‘저 사람도 이 결혼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군. 나와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한 치 흐트러짐 없이 본분에 충실한 걸 보면 자기 절제에 능한 사람일 거야. 어쩌면 말이 통하겠어. 다행이야.’


 말이 통하면, 불상사를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원치 않는 잠자리를 피하기 위해 저 남자를 다치게 하는 불상사 말이다. 


 “놀라지 마시오.”


 말에 이어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시스에게 그의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놀라지 말라니, 무슨 뜻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엉뚱하거나 망측한 추측이 시스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혹시 복장 도착 같은 것이 있나? 그래서 여자 옷을 입었다든가?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가졌나? 이상한 도구 같은 걸 들고 나타난다든가?’


 “미안하오, 나이아시스.”


 그가 또 이상한 말을 했다. 그는 이제 시스의 맞은편에 도착해 있었다.  


 돌연 음습한 직감이 시스의 심장을 옥죄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시선을 들어 신랑의 얼굴을 보기 무섭게 시스는 의자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니 어떻게, 어떻게 이런……?”


 형언하기 힘든 감정으로 시스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신랑은 경악한 시스의 눈길을 회피하며 의자에 앉았다. 


 시스는 거친 손놀림으로 웨딩 베일을 걷어 젖히고 그를 노려보았다. 


 “뭐죠? 누구죠? 누구야, 당신?”


 신랑의 예복을 갖추고 신방에 든 그는 시스가 신전에서 본 남자가 아니었다. 여신의 사제 앞에서 결혼을 서약한 그 남자와는 생김새도 분위기도 딴판인 낯선 사람이었다. 


 “내가 바로 데세르티온 프레케스요.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의 남편.”


 짧은 한숨과 함께 대답한 데세르가 잔에 와인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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