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멈춤도 늦어짐도 없이 유유하게 흘렀다. 아이들은 세월의 물결을 타고 무르익은 생의 봄으로 접어들었다. 절정의 봄이라고 화창한 날만 있는 건 아니었다. 급류와 폭풍우와 거친 바람도 있었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웃는 법을, 어떤 아이들은 이르게 깨우쳤다.
날이 막 밝을 무렵 라무스 타키툼의 동쪽에 있는 새벽의 여신의 신전에 도착했다. 카푸에 있는 최초 신전의 대사제로부터 의뢰 받은 임무를 위해 온 것이었다.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신전으로 들어서자 여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사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클레멘스 사제님?”
라무스가 불렀으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라무스는 입구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런 시각에 방문객이라니.”
이윽고 몸을 일으켜 뒤를 돈 클레멘스가 라무스에게 다가왔다.
“최초 신전의 클라비스 대사제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봉인이 된 작은 상자를 클레멘스 대사제에게 내밀면서 라무스가 말했다.
“그렇군. 그분은 여전하시겠지?”
꼬장꼬장하고, 엉뚱하고.
“예. 여전히 관대하시고, 올곧으십니다.”
라무스의 대답에 클레멘스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겉과 속이 다른 노인네 같으니라고. 클레멘스는 클라비스 밑에서 사제 수련을 했고, 클라비스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아아, 역시 예감이 좋지 않아. 최근 몇 년 동안 대사제가 보낸 전갈 중에 고달프지 않은 것이 없었단 말이지. 어쩐지 방금 기도하다 깜빡 졸았을 때 꿈에 여신께서 나오셔서 뭔가 계속 심부름을 시키시더라니.”
전해 받은 상자를 귓가에 대고 흔들어 보면서 클레멘스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중얼거렸다.
‘기도에 열중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졸고 있었던 거였군.’
라무스가 쓴웃음을 삼켰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으니 아침이나 들고 가시게. 자, 자, 이리로.”
클레멘스가 라무스를 신전 옆에 붙어 있는 사제관으로 안내했다. 라무스는 순순히 그녀를 따라가 작은 식당의 식탁에 앉았다.
라무스가 소박하지만 따뜻한 아침 식사를 들고 있을 때 누군가가 사제를 찾으면서 급하게 들이닥쳤다.
“클레멘스, 클레멘스!”
“다피넬. 낯빛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식당으로 뛰어드는 사람을 알아본 클레멘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공식 호칭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것은 두 사람의 친교가 두텁고 이 자리가 사석이기 때문이었다.
다피넬? 다피넬이라고?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는 라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라무스는 새삼스럽게 손등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틀림없었다. 저물어가는 추운 눈길에서 라무스를 구해줬던, 레이디 다피넬 프레케스.
다피넬은 클레멘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뚫을 듯 강렬한 시선을 라무스의 손등에 고정한 채.
라무스는 일말의 동요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다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이봐, 젊은이.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어. 확실해. 솜다리 여관, 기억하지?”
다피넬은 바로 알아보았다. 손등의 흉터가 결정적인 단서였다. 십여 년 전에 구해준 아이의 상처와 눈앞의 저 흉터가 꼭 맞아떨어졌다.
두 손날 부분을 맞대고 손등을 보면, 가운데가 조금 끊어지는 한 줄로 연결되는 상처. 이런 상처가 흔할 리 없었고 다피넬은 눈썰미와 기억력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때 라무스는 끝까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여태껏 다피넬에게 그는 ‘언젠가 구해줬던 아이’였고, 이제는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젊은이’인 것이다.
사려 깊은 클레멘스는 일단 조용히 옆으로 물러서서 다피넬과 라무스를 지켜보았다.
라무스는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냅킨을 들어 입 주위와 손을 닦고 몸을 일으켜 다피넬에게 다가갔다.
“레이디 프레케스입니까?”
정중하고 신중한 태도였다. 비록 오래된 일이지만 라무스에게 그녀가 은인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지난날 라무스는 어린아이로서 너무 엄청난 일을 당해 거의 패닉 상태였다. 그래서 제대로 된 감사를 표하지도 못했다.
“그래, 맞아. 나야. 십 년도 더 전에, 상처를 입은 채 추운 길에 버려져 있던 널 마차에 태워주고, 치료해 주고, 네가 솜다리 여관에 귀중하고 어엿한 손님으로 머무를 수 있게 한 달치 식비와 숙박비를 넉넉히 치러 주었던 친절한 레이디가.”
급하게 들어올 때와 달리 다피넬은 여유를 되찾은 기색이었다. 길고 구체적인 대답을 마친 그녀가 차분하게 모자와 장갑을 벗었다.
“잠시만요, 다피넬.”
가만히 기다리던 클레멘스가 입을 뗐다.
“아 네, 클레멘스.”
다피넬은 라무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눈짓을 하고는 클레멘스와 마주 섰다.
“나에게 급한 용무가 있어서 온 것 같던데, 나와 따로 그 이야기를 먼저 나눌까요? 아니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내가 자리를 피해 줄까요? 어느 쪽이 편하겠어요?”
그랬다. 다피넬은 지금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다피넬은 잠시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있잖아요, 클레멘스.”
고심 끝에 다시 말문을 여는 다피넬의 표정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뭐든 말해요, 다피넬. 내 온 진심을 다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말하면서 클레멘스는 라무스를 힐긋 돌아보았다.
라무스는 눈치껏 두 사람에게서 멀리 물러나 있었다. 그는 방의 저 끝 귀퉁이 부근에 부착된 작은 선반을 마치 조각품 감상하듯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촛대나 등잔을 얹는 용도의 단순하고 소박한 받침일 뿐이었다. 물론 라무스가 그걸 모를 리도 없었다. 그는 다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여자의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아, 저 청년이 우리 얘기를 들어도 되냐고요? 네, 괜찮아요. 친애하는 클레멘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들어줄게요.”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클레멘스는 선선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