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사실 내가 부탁할 일은, 여신의 사제로서 남을 기만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어기는 일이랍니다. 그런 일을 하면 여신의 심판을 받게 되겠죠. 살아서든 죽어서든.”
티토니아 대륙 최고의 신이자 보편적으로 믿어지는 신이 바로 아우로라 즉 새벽의 여신이었다. 아우로라의 사제들은 살아서 한평생은 물론 죽어서도 여신만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여신의 영원한 시종이었다.
“내가 아는 한 우리의 여신께서는 꽤 융통성 있는 분이랍니다. 물론 금기를 어긴 행위는 언제가 됐든 틀림없이 심판하시겠지만 그 동기에도 귀 기울여 주실 분이죠. 고마운 분을 돕기 위해서였다는 걸 참작해 주시리라 믿어요.”
재치 있게 말하며 온화하게 미소 짓는 클레멘스의 두 손을 다피넬이 덥석 부여잡았다.
“오, 클레멘스. 사제 회의에서 알게 되면 당장 당신을 파면할 만한 발언이지만 나에게는 한 줄기 구원의 빛과 같은 말이로군요.”
“그럼 이제 편하게 말해 봐요, 다피넬. 나에게 원하는 게 뭐죠?”
“사실은 조금 전 공작이, 그러니까 내 아들 데세르가 정신을 잃었어요.”
“저런!”
데세르의 병증 가운데 하나였고 클레멘스도 익히 아는 증세였다. 데세르는 종종 의식을 잃고 쓰러지곤 했는데 대개는 한나절에서 하루 사이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클레멘스는 깨달았다. 다피넬이 사색이 되어 찾아온 것도, 부탁할 것이 있다는 것도 모두 오늘 오전에 있을 데세르의 결혼식 때문이라는 것을.
“결혼식에 관한 일이군요. 다피넬이 나에게 하려는 부탁이.”
“맞았어요. 내 아들의 결혼식에 대한 거예요.”
다피넬은 저만치에 있는 라무스의 뒷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클레멘스는 자신이 맡게 될 역할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라무스. 같이 의논할 일이 생겼어요.”
클레멘스가 라무스를 불렀다.
다피넬은 그녀가 자신의 의도를 완전히 읽었다는 것에 조금 놀라는 한편 크게 안도했다.
세 사람은 테이블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이름이 라무스였구나. 의외로 흔한 이름이네.”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낀 다피넬이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제가 태어나기 직전에 제 부모님께서는 신전의 사제에게 축복을 청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사제가 축복을 내리면서 당부를 덧붙였다는군요. 이 아이에게는 반드시 흔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고.”
씁쓸한 눈빛으로 라무스가 말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고, 아버지의 성을 떠나 쫓기는 신세가 되고 나자 흔한 이름은 제법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다. 사제의 당부는 엉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랬군. 성은 무엇이지?”
물 한 컵을 입 한 번 떼지 않고 다 마신 다피넬이 물었다.
“라디우스. 라무스 라디우스입니다.”
라디우스는 진짜 성이 아니었다. 진짜를 감추기 위해 임의로 갖다 붙인 것이었다.
그러나 라무스와 아주 무관한 성은 아니었다. 라디우스는 라무스의 어머니인 프리틸라와 라무스 자신을 지극정성 길러준 엘리너의 결혼 전 성이었다.
“라무스 라디우스. 그 옛날 내가 널 구해주었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돌려서 말하지 않겠다. 나는 지금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네 도움이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오늘 나를 도와주는 것으로 과거에 내가 베푼 은혜를 갚아줬으면 하는데.”
단숨에 다피넬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뻔뻔해 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다피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아들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장래와 행복.
데세르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다피넬은 시장 한복판에서 벌거벗고 춤을 출 수도 있었다. 팔이나 다리를 잘라야 한다면 자를 것이고 눈을 뽑아야 한다면 뽑을 것이다.
당연히 목숨도 아까울 리 없었다. 데세르의 장래나 행복을 위해 자신이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다피넬은 기꺼이 죽음을 택할 것이다.
“어떻게 도와달라는 말씀인지?”
“약속부터 해. 도와주겠다고. 청부 살인을 의뢰하겠다거나 그런 쪽은 아니니까.”
라무스는 거의 감탄할 지경이었다. 레이디 프레케스, 묵은 빚을 받아내는 일에 소질이 있으시군요.
“제가 거는 조건을 받아들이신다면 약속하겠습니다.”
“조건? 말해 봐. 얼마든지.”
조건이라니. 그래 봐야 재물이거나 기사 작위 청탁 같은 것일 터였다. 그런 거라면 다피넬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사나흘 정도 머물 방을 하나 내어주십시오. 참고로 허름한 건 상관없지만 시끄러운 것은 질색입니다.”
라무스가 정말로 재물이나 기사 작위를 원했다면 다피넬은 그 한심하고 뻔한 요구를 속으로 비웃었을 터였다. 그를 한심하고 시시한 청년이라고 치부했을 거였다.
그런데 허름한 방이나 하나 내어 달라?
예상을 보기 좋게 비껴간 라무스의 요구가 다피넬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다.
“잘됐군. 마침 내 집에는 수수하면서 조용한 방이 남아도니까.”
다피넬은 흡족한 표정으로 빠르게 응수했다.
“좋습니다. 자, 말씀해 보십시오.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요?”
“결혼식의 신랑 대역.”
“예?”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라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신랑 대역이라니. 엉뚱한 정도가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다. 라무스는 차라리 살인 청부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분명 신랑 대역이라고 말했어. 오늘이 내 아들의 결혼식 날인데 아들이 갑자기 많이 아파. 그러니 내 아들을 대신해서 여신의 발아래에 신부와 나란히 서 줘.”
“그렇게라도 오늘 꼭 결혼식을 올리기를 신부도 원합니까?”
“그 아이는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다행히도 그 아이는 아직 내 아들을 본 적이 없어.”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꾹 누르며 다피넬은 눈썹을 찡그렸다.
라무스는 클레멘스 대사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사제님. 이런 거짓 결혼식을 정말 주관하실 겁니까?”
클레멘스는 고명하고 존경 받는 사제였다. 이곳 타키툼 뿐 아니라 티토니아 대륙 전역에 그녀의 명망이 드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