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는 침착하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어금니를 물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어렴풋이 짚이는 바는 있으나 짐작이 맞든 틀리든 곤혹한 일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사태를 어찌 해야 좋을까.
“당신이 틀림없는 데세르티온 프레케스란 말이죠?”
이름은 신전에서 들었던 이름이 맞았다. 그렇다면 사제 앞에 나란히 서서 결혼 서약을 했던 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연거푸 석 잔의 와인을 들이켠 데세르가 자조적으로 쿡쿡 웃었다. 잔기침이 웃음을 가로막았다. 병색이 드리운 창백한 얼굴이 괴로운 듯 일그러지고 야윈 어깨가 들썩였다.
“그러하오. 여신 아우로라께 맹세코 내가 데세르티온 프레케스요.”
이번에는 시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여신께서 지켜보시는 결혼식에 가짜를 보내다니.”
시스는 그 가짜는 누구였는지 물으려다 말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요점은 신랑 측이 가짜를 내세웠다는 것이었다. 프레케스 공작 측에서는 속임수를 썼고, 글라키에사 공작 가의 시스는 속았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페르베아투의 국왕 폐하도 아시는 일인가요?”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시스가 따져 물었다.
이 결혼은 국왕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시스는 결혼을 원치 않았다. 국왕의 엄명이 아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결혼으로부터 달아났을 터였다.
글라키에사 가문의 영지 포르미두사와 프레케스 가문의 영지 타키툼은 티토니아 대륙 여타의 대공국이나 공국과 달리 페르베아투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놓인 곳이었다.
“국왕 폐하께서는 모르시는 일이오. 그리고 당신이 믿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또 비겁한 변명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겠으나.”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데세르가 시선을 허공에 두고 말했다.
“가짜를 보낸 일은 내 의사와는 무관했소.”
나는, 비록 이런 꼴이지만 나는.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어떻게든 당신과 나란히 여신의 발아래 마주 서고 싶었단 말이오.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이 데세르의 안에서 날카로운 소용돌이가 되어 마음을 후벼 팠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오.”
데세르의 사과에는 자괴감이 묻어 있었다.
시스는 이 일을 어찌 수습할지 결심을 굳혔다.
함께 결혼 서약을 했던 신랑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 결혼을 지속해나갈 생각 같은 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귀에 들어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지병이 있다는 소문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소문이?
묻고 나니 가혹한 물음이었나 싶어 시스는 좀 미안해졌다.
소문은 사실일 터였다. 야위고 파리한 몸도 몸이거니와 데세르의 눈빛에는 병마에 오랜 기간을 시달려온 사람 특유의 체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데세르는 답하지 않았다. 망연히 샹들리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수많은 상념이 명멸했다.
글라키에사의 공녀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을 때는 그저 상대가 안됐다고만 여겼었다. 잘 대해 주어야지, 존중하고 배려해 주어야지. 막연히 그렇게 작정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들뜬 얼굴로 말해 주었다.
“네 결혼 상대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마. 나이아시스라는 그 아이가 말이다. 글라키에사의 공녀이기 이전에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초상화의 그 아이란다. 그러니 우리 공작님, 부디 희망을 가지고 힘을 내렴.”
데세르는 기뻐하기는커녕 내적 갈등과 고뇌에 휩싸였다.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가 정말로 초상화 속 그녀라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양심의 속삭임이 그를 괴롭혔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지 오래지 않아 미망인이 되어 남은 생을 불행 속에 살아야 할 운명을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쥐어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욕심이 났다. 비록 병마에 시달릴지언정 데세르도 사내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고 싶은 청춘의 사내.
번민하고 망설이다 시간이 가고, 하필 결혼식 날에 정신을 잃었다. 어머니는 가짜를 내세워 결혼식을 치러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결국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의 치장을 한 그녀와 신방에서 마주하고 말았다.
초상화의 모습보다 아름답고, 초상화에서와 달리 따뜻한 피가 도는 건강한 몸을 가진 그녀를 앞에 둔 데세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위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욕심이 더 컸음을. 자신도 사랑 앞에 이기적인 한 사내에 불과함을.
“초상화 속 그녀가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인물일 거라는 기대는 거의 없었는데.”
이제야 데세르는 용기를 내어 시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림보다 실물이 훨씬 더,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생기 넘치는 얼굴과 거기에 자리 잡은 모든 이목구비에 여신의 축복이 넘쳤다. 살짝 드러난 어깨와 팔은 가지런하고 매끈했다.
“초상화 속 그녀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그것이…….”
방의 측면 나 있는 사잇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데세르가 말을 끊었다. 발자국 소리가 사잇문 바로 저쪽에서 멎는가 싶더니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과 같은 밤 거기에서 감히 기척을 낼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레이디 다피넬 프레케스, 데세르의 어머니.
데세르는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으나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꽤 오래 전에…….”
시스는 데세르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멀어지는 걸 느꼈다. 저항할 수 없는 졸음이 엄습했다. 의자를 잡고 잠시 버티던 시스가 급히 의자에 걸터앉았다.
의지와 무관하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시스는 상체가 테이블로 기울어지는 걸 어쩌지 못하고 그만 잠에 빠져 버렸다.
사잇문이 조금 열리고 다피넬이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시스가 잠든 것을 확인한 그녀는 사잇문을 닫고 데세르를 재촉했다.
“어서 초야를 치르도록 해라. 여신의 보살핌으로 프레케스 가의 후계자가 잉태된다면 내가 나이아시스를 여신의 분신인 듯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니 데세르, 타키툼의 청년 공작이여. 어서!”
이런 상태로 초야를 치르라는 비상식적인 말에 데세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의혹을 담은 눈이 사잇문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