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들이 몇 번이나 식은 음식을 치우고 따뜻한 새 음식을 내어오는 동안 레이디 프레케스는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데세르가 오기 전에는 식사를 시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주는 태도였다.
프레케스 가에서의 첫 날이니만큼 시스도 신중하게 행동했다. 입안에 고이는 침을 몰래 삼키면서 눈앞의 음식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려 애썼다. 결국 데세르는 저녁 식탁에 나타나지 않았고 시스는 저녁을 굶은 채 마르타가 주는 진저티만 두 잔을 마셨던 것이다.
그 진저티 때문에 겪은 곤욕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만찮은 사람들이야. 경각심을 늦춰선 안 되겠어.’
홀쭉한 배를 문지르며 시스는 방을 나갔다. 주방을 찾아가서 뭐라도 좀 먹을 작정이었다.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해 걷는 시스를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레이디 시스.”
명랑하고 앳된 목소리였다. 멈춰 돌아선 시스의 앞으로 젊은 아가씨가 다가왔다. 시스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눈으로 물었다. 누구?
이 저택에 다피넬과 데세르를 제외하면 시스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없을 터였다.
“넬리사 켄트입니다. 레이디 프레케스의 시녀예요.”
몸을 살짝 굽혀 예의를 차리고 넬리사가 대답했다.
“넬리사 켄트. 그렇군요. 무슨 용건으로 날 불렀죠?”
“다피넬 마님으로부터 전갈이 있어서요. 참, 마님께서는 지금 별관에 머물고 계세요. 별관은 이 저택 뒤편에 있는 건물이고요.”
이름이 들어간 ‘다피넬 마님’이라는 호칭은 다피넬의 시녀들 가운데 총애 받는 몇 명에게만 허용되었다. 대부분의 아랫사람들은 레이디 프레케스 혹은 마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말해 봐요. 무슨 전갈인지.”
무심하고 느른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시스의 언행이 넬리사에게는 새로웠다. 레이디 시스는 넬리사가 본 어떤 귀족 아가씨와도 다른 타입이었다.
“다피넬 마님과 마르타 시녀장 두 분이 다 지독한 감기에 걸리셨거든요.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르지만 두 분께서 회복하실 때까지 당분간 여기 본채의 살림은 레이디 시스께서 맡으시랍니다. 감기가 옮을지도 모른다고 공작님과 레이디 시스의 문병도 금하셨고요.”
“어쩐지 일부러 우리와 거리를 두시겠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석연치 않다는 듯 눈썹을 모은 시스가 넬리사를 떠보는 눈빛으로 빤히 응시했다.
사실 시스의 추측이 맞았다.
다피넬은 자신과 마르타가 개입하지 않는 동안 데세르와 시스가 일상을 공유하며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데세르는 시스에게 진심이니까 그 진심을 시스가 조금이라도 볼 수 있도록 둘만의 시간을 주겠다는 거였다.
“글쎄요. 저는 그저 다피넬 마님의 명을 따를 뿐이니까요. 레이디 시스께서 아직 이곳 생활이 익숙지 않으실 테니 저더러 여기에서 레이디 시스를 도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피넬의 속뜻에 대해서라면 넬리사는 정말로 아는 바가 없었다. 넬리사는 감기 걸린 두 윗분의 수발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쁠 뿐이었다.
넬리사로 말할 것 같으면 호기심이 많고 운명적 사랑이니 모험이니 하는 것들을 꿈꾸는 아가씨였다. 허황되지만 순수한 넬리사는 자신과 무관하거나 골치 아픈 일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넬리사는 지금 사풋 들떠 있었다. 첫날밤부터 대단한 소동을 피운 젊은 공작 부부를 돌보는 일이 다피넬 마님을 시중드는 일보다 훨씬 흥미롭고 재미있을 테니까.
“도와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잘 부탁해요, 넬리사.”
시스에게도 잘 된 일이었다. 시스로서는 데세르의 치다꺼리를 맡을 이유도 의사도 없었다. 그녀에게 이 결혼은 어디까지나 사기 결혼에 불과했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레이디 시스. 그리고 제가 나름 열심히는 돕겠지만 실은 저도 썩 능력 있는 시녀라고는 할 수 없답니다. 그러니 레이디께서야말로 저를 잘 봐주셔요.”
실질적인 집안일은 하녀들 담당이니 넬리사는 데세르의 시종인 레투와 더불어 하녀들을 통솔하고 데세르와 시스의 심부름만 하면 되는 정도였다.
“그럼 공작을 잘 돌봐 주도록 해요. 나는 누구의 시중이나 도움도 필요 없는 사람이니.”
“네?”
시스가 의외의 말을 하는 바람에 넬리사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알아들었잖아요? 무슨 뜻인지는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요.”
“죄송한데요, 레이디 시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다피넬 마님께서 공작님의 시중은 레이디 시스의 몫이니 제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넬리사. 유감스럽게도 내 관점에서는 데세르의 시중은 내 몫이 아닌데 어쩌죠? 난 분명히 밝혔어요. 공작의 시중 따위 들 일 없다고. 넬리사가 어떻게 할지는 넬리사에게 달렸어요. 좋도록 해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시스는 곧장 돌아섰다. 넬리사와 말을 나누는 동안 배가 더 고파졌다. 빨리 주방을 찾아야 했다.
냉정하고 당당한 시스의 뒷모습을 보며 넬리사는 혀를 내둘렀다.
‘레이디 시스는 공작님과 다피넬 마님께 불만이 많은가 보네. 하긴 첫날밤부터 꽁꽁 묶여 헛간에 갇히는 봉변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어쨌거나 당분간 따분하지는 않겠어. 이렇게 별난 레이디라니.’
“참, 넬리사.”
계단으로 내려서기 직전에 시스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서재는 어디 있죠?”
“공작님의 서재는 이쪽이에요.”
넬리사가 데세르의 방이 있는 곳까지 와서 그 방문의 맞은편으로 난 작은 통로를 가리켰다.
“다피넬 마님의 서재도 가르쳐 드려요?”
“레이디 프레케스가 따로 서재를 가지고 계시다고요?”
시스의 얼굴에 흥미를 느끼는 듯한 기색이 어리비쳤다.
“그럼요. 책을 좋아하시거든요. 골동품에도 관심이 많으시고요. 별관 3층이에요.”
다피넬의 서재가 데세르의 서재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희귀한 책과 물건들로 그득했다. 데세르의 서재에는 책보다 그림이 더 많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주방은 어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