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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Nov 20. 2024

24. 이 결혼은 무효입니다


 현실의 시스와 그림 속 시스가 마주보고 있었다. 시스 본인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지만 데세르의 눈에 비친 두 시스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았다. 데세르에게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이루지 못할 꿈이 거짓말처럼 이루어진. 


 “붓 터치가 노련하고 색감 표현도 조화롭고 정갈해요. 화가 자신만의 스타일도 뚜렷하고요. 훌륭한 그림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평가를 마친 시스가 데세르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을 본 시스는 어떤 깨달음으로 외쳤다. 


 “데세르 당신이었어요? 이 초상화들을 그린 사람이?”


 데세르는 대답 대신 수줍게 미소했다. 


 시스는 이제야 넓은 서재를 찬찬하게 둘러보았다. 사용 흔적이 있는 각종 화구와 물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다 만 그림이 얹힌 이젤도 몇 개나 되었다. 


 “화구상에서 사 들인 저 세 점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이 그림들을 그려 왔다는 건가요?”


 “그렇소.”


 그림 속 소녀가 어떻게 자랄지 가늠하면서 데세르는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 초상화를 그렸다. 


 세 점의 본그림을 이젤 옆에 두고 수없이 보면서 붓을 놀렸다. 성장과 성숙을 반영하되 소녀의 본래 생김새에서 벗어나면 안 되었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었다. 


 “이 초상화의 인물은 내가 아니에요. 당신의 상상으로부터 빚어진 허상일 뿐.”


 “그렇지 않아. 이걸 보시오. 눈, 코, 입, 머리카락 모두 지금의 시스 당신과 똑같잖아!”


 시스의 옆에 거울처럼 걸린 초상화를 가리키며 데세르가 말했다. 격해진 감정 탓에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달라요. 내 눈빛을 봐요. 저 그림처럼 따스한가요? 내 입술을 봐요. 저 그림처럼 금방이라도 다정한 말을 건넬 것처럼 온유한가요? 천만에! 당신이 그린 그림 속 여자들은 나와 닮았지만 절대로 내가 아니야.”


 얼음처럼 싸늘한 눈빛의 시스가 냉정한 말들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그만! 그만 하시오. 그런 식으로 저 그림에 들인 내 시간과 사랑을 모욕하지 마시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죠?”


 “찾아낸 게 아니오. 포르미두사의 공녀 나이아시스는 어머니께서 날 위해 고른 아내 후보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소.”


 솔직히 데세르는 초상화 속 인물이 실존 인물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실존 인물이라면 찾아내서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간단한 서명 탓이었다. 서명은 오로지 ‘시스’라고만 되어 있었다. ‘시스’ 외의 다른 서명은 없었기에 ‘시스’가 화가의 서명인지 초상화 속 소녀의 이름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어쩐지 소녀의 이름일 것 같다는 막연한 직감이 전부였다. 


 “어머니께서는 후보들이 있는 여러 지역으로 마르타를 보내 여자들을 몰래 살피고 오게 했소. 돌아온 마르타가 어머니께 초상화 속 여자와 똑같이 생긴 후보를 보았다고 말했고.”


 다피넬은 시스의 조건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초상화 속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아들의 신붓감으로 낙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피넬은 병약하게 살아온 삶을 비관하여 결혼에 부정적이던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요컨대 엄청난 우연이라는 것이로군요.”


 “말했잖소. 나에게는 기적 그 자체라고. 내 처지를 가엾게 여기신 자비로운 여신의 가호라고 할 수도 있겠지.”


 “어느 쪽도 아니에요. 당신이 그린 초상화 속 여자는 내가 아니에요. 당신의 이상과 동경이 만들어낸,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인물이지.”


 “아니! 이건 당신이야. 아무나 붙잡고 물어 봐. 이 초상화가 당신의 초상화가 맞는지 아닌지. 백이 면 백 당신의 초상화라고 대답하겠지. 왜냐고? 바로 당신이니까! 내가 자나 깨나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한 그 시스니까!”


 시스의 냉철한 지적을 인정할 수 없는 데세르는 손을 바르르 떨며 아득바득 외쳐댔다.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요, 데세르.”


 시스는 겁을 먹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짧은 한숨을 뱉고는 차분히 말했다. 


 “당신들은 신성한 여신의 발아래에 가짜를 내보냈어요. 내 입술에서 나온 결혼 서약을 당신의 귀는 듣지 못했죠. 서약의 말은 그 가짜의 귀로 흘러들어갔으니까. 그러니 데세르티온 프레케스 공.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 나도 당신의 아내가 아니고. 이 결혼은 무효입니다.”


 “뭐라고?”


 데세르의 가슴은 내쳐지는 괴로움과 막무가내로 타오르는 정열이 엉망으로 뒤엉켜 터질 듯이 들끓었다. 


 “이 결혼은 무효라고 했어요.”


 “웃기지 마!”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데세르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쾅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 걸려 있던 초상화가 흔들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신은 여신을 걸고 당신 입으로 서약했어. 데세르티온 프레케스를 남편으로 받아들인다고. 적어도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아. 명심해,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 당신은 내 아내고 우리는 평생을 함께 할 거야.”


 노기 띤 음성으로 못박아 말한 데세르가 시스에게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공께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군요. 어쩔 수 없죠. 내가 좀 기다리는 수밖에.”


 바투 다가드는 데세르를 피해 시스는 뒤로 물러났다. 뒤에 있던 이젤이 시스의 뒤꿈치에 차여 와장창 넘어졌다.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쪽은 당신이야. 나의 시스.”


 더 물러날 데가 없는 시스의 허리를 향해 팔을 뻗은 데세르가 속삭였다. 그가 시스의 뺨 가까이로 얼굴을 숙였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던 시스는 그의 팔과 얼굴이 닿기 직전에 민첩하게 옆으로 빙글 도는 동시에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윽!”


 데세르는 가격 당한 부위를 두 팔로 부여잡고 허물어졌다. 허리를 웅크리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괴로워했다. 


 “어림없어요. 두 번 다시 허튼 수작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요. 그러다 진짜로 다치는 수가 있으니까. 몸을 사리세요, 공작님. 그러지 않아도 힘드실 텐데.”


 타이르듯이 조곤조곤 속삭인 시스가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 으아ㅠㅠ 제가 오늘 아침에 24편을 연재 브런치북에 체크하지 않고 그냥 올려 버렸네요. 종일 일이 있어서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가 이제야 확인했습니다. 브런치북으로 다시 올리고 아침에 그냥 올린 글은 삭제하겠습니다. 라이킷 눌러 주셨던 분들 그리고 댓글 주신 짱가님 정말 죄송해요오. 너그러운 양해를 구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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