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죽여야 하나 싶기도 해서

by 화진


일어선 채로 서재를 휘둘러보며 작은 소리로 대화하던 다피넬과 마르타가 촛불을 들고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자 달빛도 비쳐들지 못하는 모퉁이 공간에 숨 막히는 어둠과 정적과 긴장이 들어찼다.


라무스가 시스의 입을 막은 손의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소리를 내지 않겠다면 그 손을 떼겠다는 뜻이었다.


알아들은 시스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작게 턱을 까닥였다. 예리한 날붙이는 여전히 시스의 갈빗대 사이를 노리고 있었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이 치워지자 시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라무스는 앞으로 걸으라는 뜻으로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시스는 발을 떼어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라무스는 시스를 출입문이 있는 쪽으로 몰아갔다. 그녀를 내보내고 찾던 것을 계속 찾을 작정이었다. 문 앞에 멈춘 시스가 턱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그리로 나가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잠시 고민하던 라무스가 시스의 어깨를 다시 밀었다. 창문 앞으로 간 시스는 창을 열었다. 라무스는 그녀를 완전히 놓아 주었다.


시스는 순순히 창턱으로 올라섰다. 메타세쿼이아 쪽으로 몸을 날리는 건 문제 없었다. 그러나 시스는 이렇게 물러나지 않을 계획이었다. 마음속으로 페로에게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라무스가 뒤로 넘어졌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단단한 무언가에 가슴팍을 가격당한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닥을 굴러 다시 몸을 일으킨 라무스는 어이가 없었다. 희고 둥그런 새가 허공에 동동 떠 있었다. 가슴팍을 친 것이 그 녀석이 분명했다. 헛간 밖에서 보았던 그 새였다.


저 정도의 새가, 살아있는 새가 어떻게 무쇠 같은 단단함으로 부딪쳐 올 수가 있는지, 그러고도 저는 아무런 타격 없이 해맑게 날고 있는지. 라무스로서는 불가사의하고 기막힌 노릇이었다.


어느새 창턱에서 내려와 라무스의 앞에 선 시스의 손에 희푸른 날이 번뜩이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넘어져 구르다 후드가 벗겨져 버린 라무스를 알아본 시스의 표정이 잡아먹을 듯이 험악해졌다.


“이게 누구신가? 신랑 대역 맡았던 그 사기꾼이네? 이거 놀랍군, 놀라워. 녹스 용병이 그런 사기 의뢰도 받는 줄은 몰랐거든.”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시스가 작은 소리로 이기죽거렸다.


“나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군. 귀족 레이디께서 어떻게 단번에 녹스 용병을 알아보셨을까? 흠, 레이디 시스. 당신, 진짜 정체가 뭐지?”


마찬가지로 나지막한 소리로 라무스가 응수했다.


“나는 틀림없는 레이디 나이아시스 글라키에사야. 누구와는 달리 역할 대행 사기 같은 건 안 치거든.”


“그렇다 치고. 저 새는 뭐야? 아무리 봐도 보통 새는 아닌데. 무슨 주술이라도 걸었나?”


이마에 흐트러진 청흑색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면서 라무스가 물었다. 이건 진심으로 궁금했다.


“우리 페로에게는 주술 같은 거 안 통해. 네 말대로 보통 새가 아니라서. 아아, 나도 참. 이걸 또 대답을 해주고 있다. 내가 가끔씩 이렇게 쓸데없는 친절을 베푸는 경향이 있어.”


책장 위에 앉아 있던 페로가 두 사람 사이로 날아왔다. 페로는 머리 위 높이에서 날갯짓하며 맴돌이했다. 마치 라무스를 약 올리는 것 같았다.


“레이디 시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고심 중이야. 여기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널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지금은 죽여야 하나 싶기도 해서.”


달빛을 받아 냉랭한 빛을 발하는 비수를 힐긋 보며 시스가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가 여기에 들어온 목적이 같다고 가정하면 그 생각은 나름 합리적이군. 그런데 레이디 시스.”


“왜? 죽기는 싫어? 살려달라고 애원할 거야? 흠, 볼 만하겠는데?”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시스가 비웃었다.


“모양 빠지게 애원이라니, 그럴 리가. 설득,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도록 설득을 해보려고.”


“오호, 그래? 그것도 재미있겠네. 그럼, 한 번 해 봐.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이 결혼을 무효로 만들 생각이지, 레이디 시스?”


입가에 느긋한 냉소를 띤 라무스가 느물거렸다. 시스는 어디 계속 지껄여 보라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를 건너다보았다.


“내가 죽으면 레이디 시스와 데세르 공작의 첫날밤이 아무 일 없이 순결하게 지나갔다는 걸 누가 증명해 주지? 프레케스 가에서 당신에게 가짜 신랑을 내세웠다는 걸 누가 증언해 주지? 클레멘스 사제는 완전히 레이디 프레케스와 한통속이던데 말이야.”


“그렇게 나오니 오히려 내가 말이지. 결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걸? 역시 지금 죽여 버리는 게 답인 것 같아서.”


‘죽일 능력은 되고?’라고 속으로 물으며 라무스가 씨익 웃었다. 레이디 시스는 독특했다. 대거리를 주고받는 즐거움이 있는 여자랄까.


라무스는 녹스 용병단에서도 최정예 명단에 들어 있었다. 시스가 아무리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더라도 기본적으로 힘에서 우위에 있는 라무스를 이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미지수를 담당하는 존재가 있었다. 페로라는 이름의 저 이상한 새.


시스도 머릿속으로 열심히 따져 보는 중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지.


결론적으로 여기서 저 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의 마지막 선택지여야 했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은 찾으러 온 그것을 찾는 거였다. 시스는 결단을 내렸다.


“이봐. 사기꾼.”


“어이, 레이디 시스.”


둘의 말이 겹쳤다. 잠시 틈을 두었다가.


“할 말 있어?”


“말해 봐.”


또 동시에 말이 나왔다.


서로 먼저 말하라고 손짓을 주고받다 라무스가 손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시스가 한 번 끄덕했고 라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둘 중 하나가 죽어 봤자 나머지 하나가 예정에 없던 시체 처리하느라 골탕이나 먹지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그러니 잠시 전략적 제휴를 하는 건 어떨까 하는데?”


“사실은 나도 그 제안을 하려던 거였어.”


시원하게 대답한 시스가 비수를 거두고 악수를 하자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라무스도 접이식 단검을 접어서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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