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뭐야?”
악수를 하면서 시스가 물었다.
“그거, 나에 대한 관심인가?”
시스가 코웃음 치며 라무스의 손을 휙 뿌리쳤다.
“나중에 죽이고 나서 녹스 용병단에 연락이나 넣어 주려고 묻는 거야. 아까 말했잖아. 내가 가끔 쓸데없는 친절을 베푸는 편이라고. 말하기 싫으면 됐어, 사기꾼.”
“내 이름은 라무스야. 레이디 시스 손에 죽을 일이야 없지만 계속 사기꾼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네.”
“나도 레이디는 치우고 그냥 시스라고 불러. 근데 라무스? 흔한 이름인데, 가명이야?”
“본명이야. 믿거나 말거나.”
라무스의 목소리가 어쩐지 씁쓸하게 들려서 시스는 믿어 주기로 했다.
“라무스. 이제 우리가 찾는 물건이 진짜로 같은 건지 확인해 봐야겠지?”
“확인하나마나 같은 것이라는 예감이 들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맞지. 동시에 허공에다 손가락으로 쓰는 거 어때?”
“좋아. 나는 앞에서부터 시작하고 라무스는 뒤에서부터 시작해서 한 번에 한 글자씩 속도를 맞추어 쓰기로 하지.”
시스와 라무스는 창가로 가서 각자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달빛이 두 사람의 손을 환히 비추었다.
고개를 마주 끄덕인 두 사람은 바로 허공에 글자를 한 자씩 써 나가면서 서로 확인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쓴 글자를 조합하여 완성된 말은 ‘님파의 서’였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는 전설의 노래.
“나는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면 돼. 내가 기억력이 꽤 좋아서 말이야.”
라무스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내가 필요한 건 마지막 몇 줄이야. 그 부분만 찢겨져 나간 고서적을 이미 본 적이 있거든.”
시스도 자신만만하게 받아쳤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잠시 창틀에 기대어 선 채 궁리에 빠졌다. 님파의 서가 어디에 숨겨져 있을지.
다피넬은 서재의 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재에 들어오는 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들어오는 것이 끝이 아니라면 숨겨진 비밀의 공간이 있다는 뜻 아닐까?
둘의 머릿속에서 같은 추론이 전개되고 같은 결론이 도출되었다. 눈을 마주친 라무스와 시스가 각각 흩어져서 벽면의 책장으로 갔다.
책장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소리를 들었다. 뒤에 비밀 공간이 있다며 소리가 다를 것이다.
“시스.”
라무스의 부름에 시스가 나는 듯이 그에게로 갔다.
야광석을 꺼낸 라무스가 책장 틀 부분을 꼼꼼히 비춰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스도 야광석을 꺼내 같은 일을 했다.
“라무스, 여기.”
시스가 가리킨 부분은 두 사람이 살펴보던 책장의 맨 아래 틀 부분이었다.
얼핏 보면 나무의 옹이 부분으로 착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시스는 그것이 세월따라 짙은 색으로 변한 옹이가 아님을 간파했다. 흑단으로 따로 박아 넣은 버튼이었다.
흑단 버튼을 시스가 누르고 라무스는 책장을 이쪽저쪽 밀어 보았다. 과연 한쪽 가장자리가 뒤로 밀렸다. 더 힘을 가하자 책장이 중심을 축으로 회전문처럼 돌아갔다.
시스가 미리 지니고 들어온 초를 꺼냈다. 라무스가 휴대용 부시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촛불의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책장을 도로 닫았다.
깨끗하고 쾌적하게 관리되어 있는 비밀의 방이었다. 층층의 선반이 삼면을 채우고 가운데의 탁자에는 크기가 다른 나무 함들이 놓여 있었다.
선반에는 각종 보석과 보물, 오래되고 진귀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나 시스와 라무스가 찾는 것은 없었다.
라무스가 함을 열면, 시스는 함 안쪽으로 촛불을 비추었다. 그렇게 차례로 살펴보던 중 시스와 라무스가 동작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방금 연 함 속에 푸르스름한 색을 띤 납작한 돌판이 들어 있었다. 오래 되어 군데군데 색이 바랬지만 새겨진 그림과 문자는 또렷했다.
두 사람의 눈은 각각 기민하고 정확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다. 고대의 문자를 읽어 들이고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님파의 서
한없는 헌신.
죽일 듯한 증오.
허세 부린 가식.
비정한 외면.
광기 어린 집착.
모두가 사랑이 벌인 행각.
다만, 사랑으로 미친 사랑.
티토니아.
새벽의 여신이 축복한 땅.
기만의 신이 희롱한 땅.
거기, 미친 사랑의 춤에 몰두한 젊은이들이여.
깨어져 금 간 마음이여.
차갑게 얼어붙은 열정이여.
그대들의 삶은 극야를 지나고 있으니.
춥고 어두운 밤은 또한 길고 길어.
오판하고 혼동하고 속이고 속으리라.
절규하는 심장과 솟구치는 피만이 진실하리라.
여명에 빛나고 싶은 자여.
얼음꽃을 녹이려는 자여.
그대 무엇을 제물로 바치려는가?
정령의 초록 선율.
여신의 달빛 눈물.
그리고 붉은 사자의 발을.
물의 요정 님파의 손안에.
“충분히 보셨나?”
라무스의 말이 정적을 흩었다. 시스는 그의 눈을 보며 세로로 고갯짓했다. 그러자 라무스가 들고 있던 청금석을 원래대로 함에 넣었다.
이제 두 사람은 청금석에 적힌 내용과 그려진 그림을 완벽하게 기억했고 언제든 원본과 똑같이 재현해낼 수 있었다.
“라무스. 고대문자는 어디서 배웠지?”
혹시 라무스가 오티움 출신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별다른 의도는 없는 질문이었다. 녹스 용병 중에 오티움 출신이 없으라는 법도 없으니까.
오티움의 교양과목 중에 고대문학 강독이 있었다. 인기 없는 과목이라 수업을 듣는 학생이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시스는 좋아했었다. 그 수업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고대문자였다.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 고요히 깃드는 어둠을 시스는 놓치지 않았다.
라무스의 가슴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어머니는 고대문자를 잘 알았고 옛 시대의 문헌이나 그림을 해석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일찍부터 라무스에게 자신이 아는 것들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