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만월의 빛 속에

by 화진


수긍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시스가 다 듣고 나서는 오히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간단히 풀릴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어. 우선 달빛과 연결을 지을 수 있는 보석만 해도 생각보다 많거든. 대표적으로 문스톤을 들 수 있고, 그것 말고도 백옥이나 백수정도 있고. 갖다 붙이기 나름이야. 무엇보다, 보석이라니, 너무 빤하지 않나?”


“ 좋은 지적이야. 동의해. 증명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가설이니까. 의외로 빤한 게 답일 가능성과 우리가 완전히 잘못 짚었을 가능성이 반반인 셈이지. 그건 그렇고, 정령의 푸른 선율은?”


견해를 말해 보라는 뜻으로 라무스가 시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령과 관련된 노래나 악곡 혹은…….”


기다렸다는 듯 시스가 말했다.


“악기?”


악기라는 말은 시스와 라무스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무심코 피식 마주 웃어 버렸다. 그러고는 시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정령이 문제네. 하여튼 그 호수와 섬에 관련된 정령이겠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노래 같은 걸 두루 수집해 보면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그건 각자 알아서 할 바고. 붉은 사자의 발에 대해 뭐 짐작 가는 거 있어?”


“전혀. 그림에도 사자는커녕 고양이 한 마리조차 없었잖아.”


촛불을 두었던 자리에 촛농이 떨어져 있지 않은지 확인하면서 라무스가 대답했다.


“사자 부분이 가장 까다로운 수수께끼네. 도무지 넘겨짚어 볼 만한 단서조차 없잖아.”


시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만하면 의견 교환은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이만 여기를 정리하고 나가지.”


라무스가 말하고는 자신들이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물건들은 제자리에 잘 놓여 있는지 점검하기 시작했다. 시스는 자연스럽게 한 번 더 확인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름 유익한 대화였어. 라무스.”


“동감이야. 시스.”


두 사람은 잠시 정적 속에서 서로를 평화롭게 응시했다. 이 서재와 밀실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위기와 긴장과 협력을 거치면서 파란만장하게 흘러갔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마치 많은 것을 함께 겪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건물을 벗어나는 순간 나에게 라무스라는 인간은 갚아줄 게 남아 있는 인간일 뿐이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제 어쭙잖은 동지 의식 같은 건 던져 버릴 시간이었다. 라무스를 향한 시스의 눈빛이 다시 건조하고 서늘해졌다.


“어련하시겠어.”


해석하기 힘든 미소를 띤 라무스가 책장을 밀어 출구를 열었다. 그의 뒤에서 시스는 촛불을 끄고 초를 품속에 넣었다.


아직 달이 떠 있어 서재에는 희미한 빛이 고여 있었다. 서리처럼 차갑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만월의 빛이었다.


*


맑은 하늘이 청색 유리 같아서 공기가 더욱 차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의 냉기에 휩싸인 프레케스 저택의 전경은 어쩐지 삭막해 보였다.


라무스는 다피넬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나온 참이었다. 저택 현관으로부터 부지의 정문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라무스가 찾아갔을 때 다피넬은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 몸단장을 마치고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지금 바로 떠나겠다는 라무스의 말에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물 곳을 제공해준 것에 대해 라무스가 감사를 표하자 다피넬은 앞으로도 언제나 프레케스 저택의 문은 그를 향해 열려 있을 거라고 답했다.


모호한 미소와 형식적인 말투 때문에 라무스는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어도 별 상관은 없었지만.


담백하다면 담백하고 가식적이라면 가식적인 작별이었다. 이로써 둘 사이의 묵은 인연은 깨끗이 청산되었다고, 다피넬도 라무스도 믿었다.


겨울잠에 빠진 정원을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 등 뒤에서 라무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잠깐만요. 거기 좀 기다려 봐요.”


넬리사의 목소리였다. 라무스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그에게 넬리사는 지나치게 친절했고 대체로 성가셨으며 끝내는 난처한 아가씨였다.


불쑥불쑥 반 장난 같은 유혹을 해대니 성가셨고 그녀의 해맑은 다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지없이 물리치자니 난처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요?”


악착같이 달려와 라무스를 따라잡은 넬리사가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숨이 턱끝까지 찬 그녀의 말은 도막도막 끊어졌다.


“잠깐 멈추라는데 못 들은 체나 하고.”


호흡을 고른 넬리사가 원망스러운 빛으로 라무스를 흘겼다.


“그거야 애초에 볼일이 없는 사이니까.”


“나는 있어요, 볼일. 이거 받아요.”


넬리사는 들고 온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사양하는 바야.”


누가 들어도 하등 관심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라무스는 지체 없이 다시 발길을 뗐다.


“별거 아니니까, 잘난 척 말고 받으라고요.”


종종걸음 쳐 따라오면서 넬리사가 다그쳤다.


“말린 고기랑 말린 과일 조금 넣었어요. 보아하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 같은데 그러다 보면 먹을 것 구하기 힘든 날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럴 때 비상식량이나 하라는 건데.”


라무스는 아예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성큼성큼 걸었다. 그를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넬리사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안 받는 편이 내가 홀가분해서 그래. 그러니까 시간 낭비 말고 돌아가지?”


다시 멈춰 선 라무스가 넬리사의 눈을 보며 말했다. 말투는 어린 누이라도 달래듯 유연했지만 오히려 거절의 뜻이 더 강하게 전해졌다.


그는 이 저택을 아무것도 걸리는 것 없는 바람처럼 스쳐간 존재이고 싶었다. 어떤 흔적이나 여운도 남기지 않고.


진심이 담긴 그의 눈빛에서 마침내 넬리사도 깨우쳤다. 아무리 순수하고 바라는 바 없는 친절이라 해도 언제 어느 때나 옳고 좋은 것일 수는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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