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꼬마 라무스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사제나 주술사도 아닌데 왜 이런 것들을 잘 알아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이어받은 사명 때문이지. 라무스가 다시 물었다. 사명? 어떤 사명인데요? 어머니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지키는 사명.
지켜요? 무엇을요?
글쎄, 실은 나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어쩌면 선량함과 연약함으로 고귀한 것?
아름답고 모호했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라무스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단지 최근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꾼 십여 년 전의 사건이 어머니가 말한 사명과 무관하지 않을 듯한.
상념에 빠진 라무스를 보며 시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고대문자를 알게 된 내력에 대해 밝히기를 꺼리는 까닭은 그것이 그의 신상과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사기꾼 주제에 어떻게 그런 눈빛을 하는 거지? 숨은 진실로 말미암아 고통스럽다는 눈빛,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상처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안다는 눈빛을?’
아무리 봐도 라무스는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었다. 녹스 용병단에 속해 있고 고대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기꾼이라니. 얄팍하고 시시한 사기꾼일 리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라고. 시스는 라무스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시시한들 대단한들 사기꾼은 그저 사기꾼일 뿐.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갈까, 시스? 그 전에 전략적 제휴의 종료 시점을 확실히 하자고. 서재를 나가고부터인지, 이 별관 건물을 나가고부터인지.”
선반에 두었던 촛불을 건네며 라무스가 상황을 정리했다.
“종료 시점은 이 건물을 나가는 순간으로 하고. 잠깐, 라무스. 아직은 제휴 상태니까 우리가 본 것에 대해 의견을 좀 나눠 보는 건 어떨까? 아, 사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지적인 호기심 차원에서 말이야.”
청금석에 새겨진 글귀와 그림을 떠올리며 시스가 제안했다. 그녀가 오래 간직해온 궁금증을 푸는데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나올지도 몰랐다.
시스가 님파 라쿠스에서 주운 석귤에서 나온 생명체가 현재의 페로였다. 시스는 페로에 대한 의구심을 놓은 적이 없었다. 페로를 사랑하고 믿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석귤을 주운 사람이 왜 하필 나일까? 우연? 필연? 운명? 페로의 진짜 정체는 뭘까? 나와 페로의 만남에는 지향점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형태로 내 앞에 나타날까?’
또한 그때 보았던 님파 라쿠스와 루쿠스 즉 요정의 호수와 신성한 숲에 시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내 이끌려 있었다.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정도로.
“사적인 차원에서의 의견 교환이라,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는 거라면 나도 찬성이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탐구심을 품은 채 라무스는 시스 쪽으로 돌아섰다. 청금석에 새겨져 있던 그림의 어느 부분이 영 눈에 밟혔던 것이다.
버드나무. 수려하게 뻗은 가지에 무성한 잎을 드리운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라무스의 어머니 프리틸라의 결혼 전 성은 살리그네였고, 살리그네 가의 문장이 버드나무였다. 살리그네 가문의 영지에는 넓디넓은 버드나무 숲이 있었고 프리틸라는 버드나무를 특히 사랑했다.
달이 곱던 어느 밤에 자분자분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물결치는 버들가지처럼 나긋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라무스의 귓가에 어제처럼 생생했다.
단순한 비약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사명’과 ‘버드나무’와 ‘님파의 서’가 서로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라무스로서는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웠다.
“님파의 서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세 가지 말이야.”
골똘한 표정으로 시스가 운을 뗐다.
“꽤 흥미롭긴 하더군. 그런데 왜?”
라무스의 머릿속에도 방금 보았던 모든 것은 매우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그거 상징이나 비유일 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게 의미하는 게 뭔지 알아낼 열쇠가 노래 주위에 그려진 그림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시스 당신 생각은?”
“내 짐작도 그래. 그리고 솔직히 나는 청금석에 그려진 그 그림이 낯설지 않아. 그 풍경과 거의 흡사한 곳에 가 본 적이 있거든.”
솜다리 여관에서의 신비한 밤과 아름다웠던 풍광을 추억하는 시스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그러니까, 솜다리 언덕과 님파 라쿠스, 루쿠스. 그 호수와 언 숲의 섬 말이지?”
라무스의 기억 속 그 장소에는 그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긴 세 사람이 있었다.
그를 구해 솜다리 여관에 데려다 준 다피넬. 함께 밤의 호수와 얼음의 숲을 보았던 유령이었는지도 모를 소녀. 현재의 녹스 용병단 대장인 네우테르.
“맞아, 라무스. 그런데 쉽지는 않겠어. 그림 속에는 나무와 꽃들, 모래와 돌들이 있을 뿐 선율과 연결 지을 만한 것도, 붉은 사자와 연결 지을 만한 것도 없으니까.”
“커다랗게 묘사된 버드나무가 있던데 그 점에 대해서는 뭐 짚이는 거 없어?”
혹시나 해서 라무스가 물어 보았다.
“버드나무에도 숨은 뜻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전혀 모르겠어. 그보다 그림 곳곳에 있던 조약돌들의 모양이 꽤 일관적이었는데 기억 나?”
“조약돌? 아하, 물방울 모양이라는 말이지? 물방울이니까 눈물, 혹시 조약돌이 여신의 달빛 눈물일까?”
밀실을 밝히는 촛불이 라무스의 눈동자에 오묘한 빛으로 투영되었다.
“바로 그거야. 내가 보석 되게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 알거든. 그 사람이라면 조약돌에 대한 정보가 없더라도 여신의 달빛 눈물이라면 당연히 보석이라고 추측할 거야. 이를테면 진주라든가 그런 거.”
시스가 아는 레이디 앙켑세라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추리하리라.
“제법 일리 있는 소리로 들리는데? 대개는 보석도 돌이고, 대단한 보석에는 이름이 붙는 경우도 많지. 빛의 설산이라거나, 대양의 심장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그러니 진주에 여신의 달빛 눈물 같은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