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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피네툼 선착장

by 화진


시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말리티아가 프레케스 저택에 나타난 것을 보고 기겁하여 꼭꼭 숨어 버렸던 꿈마녀는 지금 시스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구태여 알리고 싶지는 않아서 시스는 묵묵히 꿈마녀를 안고 다독여 주었다.


티토니아에서 흑주술은 엄격한 금기였다. 그러나 백여 년 전의 사건으로 말리티아를 고발할 수는 없었다. 말리티아가 최초 신전의 심판과 단죄를 받게 하려면 이번에 그녀에게 피해를 입은 시스가, 자신이 당한 흑주술을 증거 삼아서, 직접 소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스가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스. 뭔가 이상해. 네 모습이 희미해졌어. 그뿐이 아니야. 얼마 전 너에게서 말리티아의 그림자가 사라졌기에 내가 널 꿈속으로 계속 불렀는데 넌 좀처럼 반응하지 않았어.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꿈속에서 만나고 있으면 네 생시의 현실이 보여야 하는데 지금 그게 전혀 보이지가 않아.’


문득 고개를 들어 시스를 유심히 보면서 꿈마녀가 호소했다. 그러고 보니 시스에게도 꿈마녀의 모습이 색이 날린 그림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 백작 부인. 내가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죽어가고 있어서일까, 하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아 망설이는데 마차가 덜컹 요동쳤다. 그 흔들림에 시스는 꿈에서 깨어 버렸다.


“아, 미안.”


케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멈춰 섰다.


“가도에 돌덩어리들이 굴러다닌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치우지 않으면 마차가 갈 수 없다.”


마부석 쪽에서 케노가 설명했다. 이어 케노가 돌을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무스가 날래게 밖으로 나가 케노에게 힘을 보탰다.


몇 번이나 마차를 세워 놓고 돌을 치우면서 절벽을 따라 이어진 가도를 지났다. 조급한 마음을 안고 마차를 달리고 달려 마침내 비교적 완만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가도 주위로 한 그루 두 그루 소나무가 늘어갔다. 피네툼 선착장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제 시스는 졸리지 않을 때조차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졌고, 눈을 감으면 찾아오는 혼몽함이 편안하고 아늑했다. 그 혼몽함 속에는 즐거웠거나 좋았던 기억들이 현재형으로 떠다니며 손짓했다.


빠져들면 한없이 달콤하고 행복했지만 벗어날 때마다 쓰라리게 알 수 있었다. 그 기억들은 죽음의 심연이 보내오는 유혹이라는 것을. 시스는 되도록 눈을 뜨고 있으려 안간힘 썼지만 계속 그렇게 버티기는 쉽지 않아서 때때로 달콤한 심연에 사로잡히곤 했다.


“시스, 시스. 눈 떠 봐. 시스.”


라무스의 목소리가 낮고 가늘고 멀게 들렸다. 시스는 옛 기억 가운데서도 어머니와 수수께끼 놀이를 하던 장면으로 돌아가 있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은? 시스가 잠시 생각한 끝에 답했다. 지하 묘실? 틀렸어. 어머니가 쾌활하게 웃었다. 그럼 어딘데? 눈을 감아 보렴. 감았어. 바로 거기, 감은 눈꺼풀의 안쪽이란다. 어머니, 눈이 안 떠져. 나, 눈을 뜨고 싶은데, 떠야 하는데, 안 떠져.


시스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감각이 끼쳐 왔다. 소스라치며 눈이 번쩍 뜨였다. 눈앞에 라무스가 있었다. 그는 물통의 물을 손에 조금씩 받아 시스의 얼굴에 흩뿌리던 중이었다.


“피네툼 선착장에 거의 다 왔어. 힘들겠지만 며칠만 더 버텨 줘. 그 안에 꼭 번개 반도로 데려갈 테니까.”


안도하는 눈빛으로 라무스가 당부했다. 시스는 눈동자에 힘을 줘 초점을 맞추고 그의 눈을 지긋하게 응시했다. 그녀 나름의 약속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력하겠다는.


라무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케노를 불렀다. 케노가 마차를 세웠다. 라무스가 마부석으로 나가고 케노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소나무 방풍림에 둘러싸인 피네툼 선착장에 도착했다.


거칠지도 약하지도 않은 바닷바람이 푸른 소나무를 흔들고 아침 햇빛이 초승달 호수의 물결과 파도에 반짝이는 물비늘을 흩뿌렸다. 계선잔교에는 대형 상선 우리우스호가 정박해 있는데 과연 듣던 대로 웅장하면서 우아했다. 막 돛을 올리는 것으로 보아 곧 출항할 모양이었다.


우리우스호는 초승달 호수를 남북으로 오가면서 게르미노와 페르베아투 사이의 교역품을 실어 나르는 상선이었다. 게르미노에서 건너가는 것은 주로 보석과 곡물 그리고 벌꿀과 밀랍이었고 페르베아투에서 건너오는 것은 유리와 모피, 철 등이었다.


“두 사람은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가서 선장을 만나고 올게. 보아 하니 곧 출항하려나 보군. 운이 좋았어.”


시스와 케노를 두고 라무스는 선착장으로 갔다. 선원인 듯한 사내 하나를 불러 세운 라무스가 은화 한 닢을 건네며 선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은화의 힘은 강력하고 즉각적이었다. 사내는 라무스를 곧장 선장이 있는 화물 창고로 안내했다.


선장은 값비싼 귀중품이 든 튼튼한 나무 상자 옆에 서서 그것을 선장실로 옮겨갈 심복 부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투스 선장님?”


“그렇네만.”


“나와 일행 둘을 물방울 섬에 데려다 주시오. 사례는 충분히 하겠소.”


“다른 때 같으면 흔쾌히 받아줬겠지만 이번에는 곤란하다네. 이틀 전부터 오늘 새벽까지 때 아닌 풍랑과 폭풍우가 사납게 몰아쳐서 출항이 늦어져 버렸단 말이지. 풍향이 도와주고 노꾼들이 무리를 해도 기한 내에 글라레아 선착장에 댈까 말까 한 상황이라네. 참 희한도 하지. 초봄마다 불어오는 바다할미 심술풍은 지난번 초승달이 떴을 때 이미 지나갔으니 계절이 바뀔 때까지 당분간은 그처럼 심한 풍랑이 올 일이 없는데.”


노투스 선장은 자신도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는 듯 후 하고 긴 날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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