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스는 시선을 살짝 떨어뜨렸다. 노투스 선장은 그가 낙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이, 안됐지만 이만 가 보게.”
“달리 도리가 없다면.”
마음을 정한 라무스가 나직이 말했다. 노투스 선장은 그를 내버려 두고 옆으로 돌아 상자 위에 놓인 양피지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 우리우스호에 실은 물품의 목록과 인수자의 이름이 기록된 장부였다.
“내 식으로 해결할 밖에.”
노투스 선장은 자신의 뒤통수 쪽에서 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의 두 팔은 뒤로 제압당했고 턱은 억센 손아귀 안에 있었다. 들고 있던 양피지 장부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열쇠 꾸러미는 빼앗겼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턱을 감싼 손이었다. 달걀을 쥐듯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는데도 간결한 움직임으로 목을 꺾어 버릴 수 있다는 살기와 자신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노투스 선장은 직감했다.
이 젊은이는 효율적인 살인의 기술을 익힌 자로구나. 허튼 수작 따위는 꿈도 꾸지 말아야겠구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 목숨 빼앗는 걸 싫어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결행해 버리는 부류라오. 그러나 선장, 우릴 물방울섬으로 데려다 주면 당신은 무사할 거요. 섬에 내리기 전에 열쇠와 장부도 돌려줄 거고. 한 가지 더, 나와 일행이 선장과 함께 선장실에 머물 거요. 우리가 물방울섬에 내리기 전까지 당신은 우리 인질이니까. 동의하면 고개를 끄덕이시오.”
차분하고, 품위마저 느껴지는 협박이었다. 노투스 선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선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야 하고, 두 번째로 열쇠와 장부가 없으면 이번 운송 업무를 망친다. 그렇게 되면 우리우스호의 선장 자리도 내어 놓아야 하리라.
“선장이 협조를 잘 해준다면, 아까 제시했던 충분한 사례도 당연히 하겠소. 그 사례는 살리그네 공작 가에 청구하면 되오. 편지를 써 주겠소.”
우리우스호는 살리그네 가의 소유였다. 게르미노 공국에서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권리는 공작 가에 귀속되어 있었다. 해상 운송 사업의 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노투스 선장은 세다투스 공작의 가신인 셈이었다.
“젊은이, 게르미노 사람인가?”
“아니오. 하지만 게르미노를…….”
라무스는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의 땅인 게르미노를 사랑한다고 말할 뻔했다.
게르미노는 그가 태어난 곳이고, 태고의 버드나무숲은 그가 플라토르라는 이름과 축복을 받은 곳이었다. 세다투스의 후계자인 프리틸라의 유일한 혈육이 라무스였으니, 게르미노의 평화로운 존속을 지킬 의무는 라무스의 피 속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하고, 세다투스 공작님을 존경한다오.”
노투스 선장은 그의 말을 가만히 곱새겨 보았다. 협박하는 자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고, 왠지 모르게 진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선장은 고개를 작게 끄덕여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 즉시 그의 몸이 자유롭게 놓여났다.
“선원들에게는 자네 일행을 내 손님인 것으로 해두면 되겠지?”
눈앞의 젊은이를 찬찬히 뜯어보며 노투스 선장이 말했다.
후드를 푹 눌러 쓰긴 했지만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건 아니어서 생김새를 알 수 있었다. 방금 전의 살기는 어디에서 나온 건가 싶게 기품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만 형형한 눈빛에 예리한 검이 들어 있었다. 평범한 젊은이는 아닐 터였다.
“좋도록 하시오.”
라무스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선원 두 사람이 창고로 들어왔다.
“어, 여기다. 이 상자를 선장실에 들여다 놓도록.”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선장이 지시했다. 선원들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가장 값비싼 물건들이 채워진 상자를 들고 나갔다.
“선장은 나를 따라 오시오. 마차에서 기다리는 내 일행들을 데리러 가야 하니.”
이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라무스 일행은 선장과 함께 선장실에 자리 잡았고, 눈치 빠른 선장은 시스나 케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파도는 보통이었고 순풍이 불었다. 선장은 노를 잡아본 경험이 있는 선원들을 모아 노꾼을 증원하여 배가 일관되게 최고 속력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마침내 물방울섬을 눈앞에 두었을 때 라무스와 함께 갑판에 나와 있던 노투스 선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커다래지고 입이 벌어졌다. 예상보다 훨씬 이른 도착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글라레아 선착장에 기한 내에 닿는 것도 문제없었다.
노투스 선장은 우리우스호에서 나룻배를 내리게 했다. 선장이 먼저 밧줄 사다리를 내려가고 이어 시스를 등에 업고 줄로 묶어 고정한 라무스가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시스의 망토로 온몸을 꽁꽁 가린 케노가 팔의 힘만으로 가뿐하게 밧줄 사다리를 탔다.
업었던 시스를 내려놓고 라무스는 노를 잡았다. 노투스 선장도 그와 함께 노를 저어 물방울섬 연안으로 갔다.
“여기 있소. 열쇠 꾸러미, 양피지 장부, 그리고 선장에게 사례금을 주라는 편지.”
“곧 바닷길이 열리겠군. 성공하길 빌겠네.”
라무스의 손등에 난 흉터와 케노에게 힘없이 기대 누워 있는 시스를 번갈아 보며 노투스 선장은 연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저 젊은이들이 풀게트 관문을 통과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너머에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 신비의 땅 번개 반도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걸. 그게 아니고서야 바닷길이 열리는 시기를 틈타 물방울섬에 올 까닭이 없을 터였다.
노투스 선장의 나룻배가 물방울섬을 벗어나 우리우스호로 향했다. 라무스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가자. 저쪽이다.”
시스를 안아 든 케노가 하나뿐인 다리로 펄로 된 연안을 폴짝폴짝 뛰어갔다. 라무스가 성큼성큼 케노를 따라잡아 나란히 걸었다. 동살이 번지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