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섬은 육지보다 훨씬 따뜻해서 벌써 봄이 한창이었다. 듬쑥한 풀이 풋내를 풍기고 들꽃이 만발했으며 나무에는 신록이 무성했다.
습기 어린 바람을 맞으며 바닷길 앞에 도착한 세 사람은 해변에 앉아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오른쪽으로 모루스 해의 수평선이 붉게 물들어 갔다. 아침노을은 푸른 물결 위에도 조각조각 얼비쳤다. 곧 태양이 바다 위로 올라올 조짐이었다.
시스를 옆으로 안은 채로 바닷가에 앉아 있던 케노가 방향을 틀었다.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눈부신 빛의 향연이 시스의 정면에 펼쳐졌다. 그러나 시스는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의 의식은 여기 물방울섬의 해변이 아닌 어딘가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녀는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무게가 없는 발걸음이었다. 구름과 구름 사이인 것도 같고 물속인 것도 같았다. 한 가지 분명하게 실감되는 건 뒤에 남겨진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득한 단절감에 심장이 뻐근했다.
“시스도 저 광경을 봤으면 좋겠다. 붉다. 빛난다. 눈부시다.”
케노의 목소리는 염려와 근심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본디 과묵한 편인 케노는 무슨 말로 시스를 깨워야 할지 모르겠어서 커다란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염려와 두려움이 일렁이는 눈으로 케노는 라무스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깨워 보라고. 어떻게든 시스의 눈을 뜨게 하라고.
라무스도 근심에 찬 얼굴이었다. 시스의 생명이 실낱처럼 연약하고 가늘어진 걸 그도 느끼고 있었다.
“시스, 시스, 시스.”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도 보고 얼굴에 물도 뿌려 보았지만 시스의 속눈썹은 들리지 않았다.
“피리 소리를 들려줘 보면 어때, 라무스? 나한테 들려줬던 것처럼.”
케노는 주장했던 바가 있었다. 자신이 라무스의 풀피리 소리를 듣고 지팡이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한 거라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라무스는 일어나서 갈대의 속대를 뽑았다. 그는 심을 제거한 속대를 돌돌 말아 잘랐다. 길이가 다른 몇 개의 갈피리를 나란히 잡은 그가 바람을 불어 넣었다.
높고 낮은 소리들이 따로 또 같이 흘러나왔다. 피리 소리는 단순하지만 가볍고 청아했다. 그 소리는 의식의 저편으로 멀어지던 시스에게도 가 닿았다. 소리가 실체감을 지닌 듯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끌어 당겼다.
“깼다! 시스가 깨어났다!”
케노가 기뻐서 소리쳤다. 라무스는 갈피리를 입술에서 떼고 시스의 눈을 보았다. 바다의 목청색을 닮은 눈동자가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라무스와 케노의 시선도 시스의 시선을 따라 바다 저 끝으로 향했다.
‘모루스 해가 왜 모루스 해인지 알아?’
시스는 정신을 차리고 있기 위해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마음속으로나마 한사코 늘어놓았다.
‘동쪽 바다 끝의 물속에 모루스라는 나무가 있대. 새콤달콤한 열매를 맺는 나무인데 그 열매는 포도를 자그맣게 축소해 놓은 모양이고, 붉게 열려서 검게 익는대. 그 나무에서 해가 나온대. 어머니가 해주셨던 옛날 얘기야. 그때의 난 가지에 해를 매단 커다란 나무가 정말로 바닷속에 있다고 믿었어. 어렸으니까. 신비롭고 아름다운 상상을 하는 게 즐거웠으니까.’
시스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음을 모르는 케노와 라무스는 조용히 번갈아 시스를 살필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페로가 날아와 시스의 앞에서 날갯짓과 몸짓으로 반응해 준 것이었다. 비록 그 내용은 모루스의 열매를 먹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천진난만한 페로는 이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고 때마침 해의 머리가 바다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거의 동시에 바다가 꿈틀거리더니 서서히 갈라졌다. 한참만에 물방울섬과 윗송곳니 반도 사이에 길이 생겼다. 몇 사람이 나란히 건널 만한 폭이었다.
세 사람은 바다 위로 떠오른 붉누른 해를 옆으로 맞으며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어 윗송곳니 반도의 절벽으로 이어지는 길에 다다르자마자 바닷길에 다시 물이 들어왔다.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절벽을 타고 돌아 올라가는 계단 모양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시스를 안은 케노를 앞세우고 라무스가 뒤를 따랐다. 케노는 용케 넘어지거나 비틀거리지 않고 계단 길을 척척 올라갔다.
꼭대기에 올라서자 뜨거운 기운과 자욱한 수증기, 톡 쏘는 냄새가 셋을 맞이했다. 수증기에 가려진 하늘에서는 이따금씩 번개가 번쩍였다. 풀게트 관문의 시작점이었다. 풀게트 관문은 따로 지형지물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번개 반도까지가 다 풀게트 관문이었다.
“풀게트 관문이야. 험난한 여정은 이제부터지. 마음의 준비는 됐지?”
남은 기운을 모조리 눈꺼풀에 그러모아 간신히 눈을 뜨고 있던 시스가 시선만 살짝 내렸다 들었다.
“시간이 없다. 빨리 가자.”
케노가 시스를 안은 채로 성큼 동쪽 방향으로 나섰다.
“케노, 안 돼.”
라무스가 황급히 케노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장을 서야 해. 길에 어떤 어려움과 함정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다행히 난 남들보다 길을 잘 찾는 재능이 있으니까. 실은 그게 풀게트 관문에서도 유효할지 어떨지는 알 수…….”
라무스가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은 새하얀 수증기 너머에서 갑자기 뜨거운 분수 같은 것이 뿜어져 날아온 탓이었다.
다행히 라무스가 간발의 차이로 빨랐다. 그는 뜨거운 물이 끼쳐오기 직전에 케노와 시스를 감싸 안고 옆으로 빙글 돌아 피했다. 물이 떨어진 자리의 검은 돌에서 푸식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올랐다.
“조심 또 조심히 따라와. 수증기 때문에 시야도 막혀 있고 땅바닥도 디디지도 못할 만큼 뜨거운 지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방금 전에 본 것처럼 거의 펄펄 끓다시피 하는 온천 분수도 언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고.”
라무스는 케노에게 단단히 당부하고는 주의 깊게 발을 내딛었다. 어쩌면 지금 아는 것보다 더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두터운 수증기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