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뿌옇게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짙은 안개가 모든 것을 지우는 땅이었다. 시각에 의지할 수 없었고 방향감각도 사라졌다. 라무스는 처음에 잡았던 방향 즉 동쪽을 겨냥해 똑바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번개 반도는 윗송곳니의 동쪽 끝이니까.
온통 흰 시야의 멀고 높은 지점에서는 번개가 자주 날붙이 같은 빛살을 내리그었다. 발밑에서는 이따금씩 좁거나 넓은 틈새가 나타났다. 틈새의 저 아래에는 시뻘겋게 끓는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라무스는 마음속으로 어느 때보다 간절히 새벽의 여신을 찾았다.
아우로라시여, 저희에게 가호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를 삼키려는 밤보다 깊은 어둠으로부터, 다가오는 미지의 위험으로부터, 부디 저희를 지켜 주십시오.
“케노. 시스는 어때?”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다. 숨결도 너무 약해졌다. 빨리 도채비족에게 가야 한다.”
케노의 대답에 라무스가 뒤를 돌아 시스의 코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숨이 가늘었다. 놀란 라무스는 자신도 모르게 시스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 댔다. 심장의 박동도 당장이라도 다시 뛰지 않을 것처럼 느리고 미약했다.
케노의 머리 위를 날면서 따라오던 페로가 시스의 어깨 쪽으로 내려왔다. 페로는 시스의 얼굴에 몸을 부비며 뀽뀽 애달픈 소리를 냈다. 시스의 얼굴은 주위를 가득 메운 수증기와 안개보다 창백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페로가 라무스에게 오더니 작은 부리로 그의 손을 쪼아댔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일 터였다. 라무스는 페로를 내려다보며 번개 반도와 도채비족에 대한 풍문이 허황된 것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 중에서도 거기에서는 죽은 사람도 살린다던 말을.
“시스, 내 말 들려? 여기까지 온 이상 난 포기하지 않아. 당신과 함께 반드시 번개 반도에 도착하겠어. 도채비족이라면 당신이 어떤 상태든 되살릴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 믿어. 알았어?”
케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순간 라무스는 어머니의 유모 엘리너를 떠올렸다. 엘리너는 지혜가 있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전승되어 내려오는 속설을 믿는 노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들려주곤 하는 옛날이야기 중에 지금 라무스가 매달리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엘리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화였다.
병든 할아버지의 숨이 넘어가려던 찰나에 아버지가 예로부터 전하는 속설에 따라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를 할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다고. 그러자 할아버지는 거짓말처럼 숨이 돌아와 여섯 달을 더 사셨다고.
어린 라무스는 그 얘기를 진지하게 풀어놓는 엘리너에게 ‘에이 거짓말, 말도 안 돼’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채 콧잔등에 주름이 잡히도록 모호한 미소만 지었다. 엘리너가 ‘정말이라니까요, 도련님’이라고 말하며 그 콧잔등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던가.
‘라무스 도련님. 그건 단순히 피를 먹인다는 행위가 아닌 거예요. 살리고 싶다는 절실한 기원을 행동으로 옮기는 거랍니다. 생명의 기운을 나누어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라무스가 단검으로 왼손의 약지 끝을 빠르게 그었다.
“제발 돌아와 줘, 시스. 살아서 도채비족을 만나자.”
피가 뚝뚝 듣는 약지를 시스의 입술 위로 가져가면서 라무스가 말했다.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페로에게도 핏방울이 튀었다. 페로는 잠시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더니 가늘고 긴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페로의 반응이 케노와 라무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라무스의 약지에서 흘러나온 피는 시스의 입술을 붉게 적시고 입안으로 스며들었다. 숨 막힐 듯한 압박감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라무스는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상황이 한없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시스가 밭은 숨을 길게 토해내며 눈을 떴다. 라무스는 피 흐르는 손가락을 거두어 다른 손으로 꽉 틀어쥐었다.
“시스가 눈을 떴다. 시스가 살아났다.”
케노가 기쁨에 겨운 울먹임과 함께 외쳤다. 라무스는 시스의 눈을 보며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
“버티라고 했잖아.”
시스는 그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속눈썹을 천천히 한 번 내렸다가 올렸다.
‘알았어.’
의식 저 너머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길을 가던 시스는 깊은 물속인 듯한 곳에 거의 다다랐었다. 위를 올려다본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파르스름한 수면을 덮은 얼음이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시스는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머물렀던 세상과의 영원한 단절 앞에 자신이 서 있음을. 그때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지금, 여기였다. 염려와 기원의 눈빛들이 자신을 지키고 있는.
“자, 다시 길을 서두르자.”
라무스가 말하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케노는 소매로 시스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 빠르게 그를 따라나섰다.
공기가 뜨거웠다. 발밑의 틈새에서는 용암의 뜨거움도 올라왔다. 라무스는 땀을 줄줄 흘리면서 오직 직감에 의지해 발을 옮겼다. 다행히 땅은 그를 외면하지 않고 온천 분수와 용암으로부터 안전한 지점을 딛게 해주었다.
얼마나 갔을까, 흰 수증기와 안개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어리비쳤다. 라무스는 바짝 긴장하여 멈춰 섰다. 검은 그림자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냐?”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태세를 취한 채 라무스가 물었다. 검은 그림자는 대답 없이 몸을 훌쩍 날렸다.
라무스는 본능에 가까운 방어 능력으로 그림자의 기습 공격을 막아냈다. 검이 검을 쳐내는 쇳소리가 귓전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왜 우릴 공격하는 거지? 우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죽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비켜라.”
엄중하게 경고하면서 라무스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후드와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상대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검은 기사는 대답 없이 다시 검을 휘둘러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검을 부딪쳤다 떨어지면서 라무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은 기사의 눈이 자신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닮은 것이 아니었다. 검은 기사는 바로 라무스 자신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