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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불새의 노래

by 화진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가? 실로 짧은 순간 속으로 살아온 모든 시간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영원을 닮은 찰나인 걸까? 시간의 파도는 케노와 시스의 눈에서도 일렁였다. 그리고 눈앞의 모든 걸 지우는 빛이 찾아왔다.


어떻게 된 거지?


라무스의 귀에 가늘고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천상의 피리 소리 같았다. 측화산에서 부스러져 나온 불타는 재와 검은 기사가 날린 검은 라무스에게 다다르지 못했다.


하얀 수증기와 안개 사이사이로 스며든 오색찬란한 빛의 입자가 눈부셨다. 이것은 끝도 죽음도 아니었다. 라무스는 반사적으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묘하게 반짝이는 붉은 깃털을 가진 거대한 새가 라무스 일행을 방패처럼 보호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피리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새의 소리였다. 그러니까, 불새의 노래.


“넌……!”


라무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불새의 이마와 부리에 갓 묻은 듯한 핏방울이 루비처럼 굳어 있었다. 아까 라무스의 피가 튄 자리였다. 블랙오팔을 닮은 새의 눈을 시스도 곧바로 알아보았다.


‘페로! 너, 굉장히 멋진 새였구나. 내가 불새를 만나다니.’


케노만이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어…….”


당황한 케노가 내는 소리였다. 페로가 커다란 황금빛 발가락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케노와 시스, 라무스를 양쪽에 움켜쥐고 상공으로 높이높이 날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수증기와 안개를 벗어나자 별이 뜬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로는 어스름한 구름의 바다가 펼쳐졌다.


벌써 밤이 왔다고? 풀게트에서는 시간의 흐름마저 달라지는 걸까? 위화감 속에 라무스는 길잡이별의 위치를 확인했다. 불새가 날고 있는 방향의 왼쪽 먼 하늘에 푸르고 환한 별이 떠 있었다. 그렇다면 맞게 가고 있는 거였다. 동쪽으로, 번개 반도로.


페로는 빛이 흐르는 날개를 가만히 편 채로 조용하고 우아하게 날았다. 불새는 단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도 아주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었다. 이내 페로는 고도를 낮추었다.


라무스와 케노, 시스는 까마득한 바위산의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졌다. 그 바위산은 풀게트 관문의 끝인 동시에 번개 반도로 가는 길목이었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물을 식별하기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희붐했다.


세 사람을 내려준 페로의 몸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몸집 또한 점점 작아졌다. 그렇게 페로는 화려하고 당당한 불새의 모습에서 희고 동그랗고 작은 새로 돌아가 버렸다. 작은 새는 라무스의 어깨에 앉더니 축 늘어져서 팔딱팔딱 숨을 몰아쉬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고맙구나.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 때문에 네가 큰 무리를 한 모양이다.”


라무스가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아마도 이 불새는 아직 탈화할 시기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심전력하여 잠시 불새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듯했다.


페로의 부리와 이마에는 아직도 붉은 점처럼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닦아 주려고 라무스가 옷소매로 문질렀으나 소용없었다. 일부러 염료를 넣어 새긴 문신이라도 되는 듯 자국은 오히려 단단하고 선명해졌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산봉우리를 둘러싼 운무를 돌아보며 케노가 물었다. 케노의 굳건한 팔은 여전히 시스를 안정적으로 안아 든 채였다.


“길을 찾아봐야지.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소리 나는 쪽으로 가 보자.”


일부러 세워 놓은 것처럼 뾰족한 모서리로 서 있는 바위를 돌아 라무스와 케노는 조심스레 돌길을 걸었다. 조금 내려가니 과연 흐르는 물이 나왔다. 물은 높이 솟은 폭포에서 쏟아져 내려 바위산 아래로 흘러내렸다.


“저기인 것 같군.”


라무스가 흰 포말로 부서지는 폭포를 가리켰다.


“길이 없다. 저건 폭포다.”


케노가 머리를 갸우듬하게 기울이고 라무스를 보았다.


“속임수지. 흘러가는 물의 양을 봐라, 케노. 떨어지는 폭포수보다 훨씬 많아. 그건 곧 폭포 뒤에 숨겨진 물길이 또 있다는 거야.”


라무스는 자신 있게 성큼성큼 폭포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와, 케노! 역시 동굴이 숨겨져 있었어!”


우묵한 공간에 반향된 목소리가 폭포 소리를 헤치고 나왔다. 케노는 시스와 한 번 눈을 마주친 다음 시스의 얼굴에 폭포 물이 닿지 않게 상체를 수그려 풀쩍 뛰었다.


라무스와 케노는 종아리 깊이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걸었다. 동굴 안의 공기는 축축하고 신선했으나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메아리치는 물소리가 은은하게 귀를 간지럽혔다. 그리 어둡지는 않았고 앞으로 갈수록 조금씩 밝아졌다.


동굴이 끝나고 바깥으로 나서자 다시 구름과 안개의 세상이었다. 볼 수 있는 것은 발이 담긴 냇물밖에 없었다. 선택지는 그 물을 밟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이 미묘했다.


“발밑이 이상하다. 땅이나 바위를 밟는 느낌이 아니다.”


앞서가던 라무스의 옷자락을 케노가 잡아당겼다. 냇물은 구름과 안개 사이에서 흘러나와 동굴로 들어갔다.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그래.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저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는.”


케노가 수긍하자 라무스는 시스를 내려다보았다. 시스가 힘들게 느릿느릿 눈을 한 번 깜박여 보였다. 라무스의 어깨에 엎드려 있던 페로가 크게 하품을 하더니 재촉이라도 하듯 머리를 까닥까닥하며 몸을 들썩였다.


푹신한 듯도 하고 물컹한 듯도 한, 그저 희푸르게만 보이는 냇물을 디디며 라무스 일행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서리서리 떠다녀서 주변 풍경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땅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번개 반도가 어떤 옛이야기에서는 반도로 또 어떤 옛이야기에서는 섬으로 전해지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 듯한 물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밑은 물이 아니라 부드러운 이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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