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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번개 반도의 도채비족

by 화진


“땅이다. 번개 반도다.”


케노가 외발을 동동 구르며 들뜬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시스가 있는 힘껏 눈을 떴다.


‘여긴 저쪽과 계절이 다르네. 아름다운 곳이야.’


길 양옆으로는 무성한 양치식물과 여러 종류의 딸기가 열린 나무들이 덤불을 이루고 있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우거진 아름드리 활엽수들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일행이 서 있는 길 끝에 작은 강이 흘렀다. 산들바람에서 푸른 내음이 났다.


“어서 가자. 저기로 건너가야 할 것 같군.”


주위를 살피던 라무스가 강 위에 다리처럼 놓인 나무를 가리켰다. 케노는 나는 듯이 뛰어 앞장섰다. 창백하고 수척해진 시스를 안은 케노도 마음이 급하기로는 라무스 못지않았다.


라무스는 케노와 함께 달리면서 풀과 나무와 돌들이 수런대는 것을 느꼈다.


스적스적, 자그락자그락. 마치 재잘거림 같은 파동이 라무스를 앞질러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강의 이쪽과 저쪽 기슭을 연결하며 누운 나무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뿐만 아니라 살아 있었다. 이쪽 기슭에 뿌리를 내린 채 저쪽 기슭에 머리를 대고 누운 모습이었다. 나무 위로 올라서려던 케노가 머뭇거렸다.


“왜 그래, 케노?”


“나무가 움직였다.”


케노의 말 대로였다. 나무가 천천히 머리를 들더니 줄기를 곧게 일으켰다.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달피나무의 풍성한 이파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호오, 다들 피리 부는 자가 왔다고 떠들어대던데, 너냐? 네가 플라토르냐?”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로 나무가 라무스를 보며 물었다.


“플라토르라는 이름을 가진 건 맞습니다만.”


나무의 눈처럼 보이는 두 개의 옹이를 올려다보며 라무스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가졌으면 피리 부는 자라는 말인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구나?”


나무가 가지 두 개로 팔짱을 끼더니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저희를 건너가게 해주시겠습니까? 실은 급한 사정입니다. 목숨이 달린 일이지요.”


라무스가 공손하게 부탁하자 나무의 옹이가 시스를 내려다보더니 복잡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저런…….”


달피나무의 잎들이 좌우로 잔잔하게 물결쳤다. 나무는 조용히 다시 줄기를 눕혔다.


“고맙습니다.”


나무를 다리 삼아 강을 건넌 라무스가 감사 인사를 했지만 나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라무스와 케노는 돌아서서 두리번거렸다. 도채비족은 어디에 있는 거지?


숲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풀과 들꽃으로 뒤덮여 있고 여기저기에 커다란 반원형으로 솟은 봉우리가 흩어져 있었다. 그 중 라무스 일행과 가까운 봉우리의 풀 덮인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왔다. 맑은 외모를 지닌 반듯한 할머니였다.


“어머나, 인간의 몸으로 용케 여기까지 찾아왔네?”


“라무스입니다. 여기는 케노, 그리고 시스. 할머니는 도채비족이십니까?”


“도채비족은 맞는데. 아니, 할머니라니? 이봐, 난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어린 막내라고. 이름은 비텍스. 흠, 넌 피리 부는 자로구나.”


비텍스는 소녀처럼 명랑하게 웃었다.


“비텍스님. 부탁드립니다. 흑주술을 풀어 주십시오.”


라무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흑주술? 그랬구나. 가엾어라. 그런 일이라면 우리 종족의 최연장자이신 파트로나 님께 가야지. 따라와.”


노인의 모습, 노인의 음성이었고 소녀의 걸음걸이였다. 비텍스는 나비처럼 나풀나풀 풀밭을 뛰며 앞장을 섰다. 공터 한가운데로 들어간 비텍스는 그녀가 나왔던 문과 비슷한 풀투성이 문앞에 섰다. 라무스의 눈으로는 문이 있다는 걸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파트로나 님. 비텍스예요. 손님을 데려왔어요. 저쪽 땅에서 온 인간들인데, 아, 인간 둘에 귀린의 아이 하나요. 그런데 흑주술을 풀어 달래요.”


“이게 다 무슨 소리냐, 비텍스. 설마 또 이 늙은이를 놀리는 건 아니겠지?”


문이 열리고 조그만 여자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머리카락이 연두색으로 빛나고 얼굴은 상아로 빚은 조각상처럼 매끈하고 귀여웠다.


“이들을 보세요. 정말이잖아요?”


주름진 얼굴에 뾰로통한 표정을 띤 비텍스가 라무스를 파트로나 앞으로 떠밀었다. 아이의 모습을 한 파트로나가 뒷짐을 지고는 노인의 눈빛으로 라무스 일행을 주시했다.


“풀들과 돌들과 나무들의 수다가 사실이었구나. 반갑다, 플라토르.”


“파트로나 님. 시간이 없습니다. 시스를 구해 주십시오.”


라무스가 다급하게 두 무릎을 꿇었다.


“흑주술이요, 흑주술.”


비텍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집 안으로 데려다 눕히거라.”


파트로나가 문을 활짝 열고 비켜섰다.


창문도 없고 불도 밝혀져 있지 않은 내부는 어두웠다. 케노가 귀린의 불을 밝히지 않았다면 라무스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린 불이 없어도 다 보이는데.”


비텍스에게는 인간들의 평범한 시력이 오히려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너희는 나가 있으렴.”


파트로나가 작고 흰 손을 시스의 이마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라무스와 케노, 비텍스는 묵묵히 바깥으로 물러났다.


“여기선 어떻게 제가 플라토르인 걸 다들 그렇게 아시는 겁니까?”


아까 강을 지키던 달피나무에게도 묻고 싶었지만 참았던 질문이었다. 라무스는 무언가에 단단히 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도채비족이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니? 플라토르에게서는 피리 소리가 들리는데 말이다. 물론,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지만.”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은빛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비텍스가 웃었다.


“라무스. 시스는 이제 괜찮아지겠지?”


아직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케노의 어조가 조심스러웠다. 라무스가 케노를 안심시키는 말을 하려는데 파트로나가 나왔다.


“흑주술은 풀었다만…….”


말끝을 흐리는 파트로나는 적잖이 난감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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