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는 풀빛의 얼굴이 더욱 퍼래져서 커다란 귀를 쫑긋 세우고 파트로나의 입에서 다음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줄곧 쾌활했던 비텍스조차 흰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라무스는 파트로나가 쉬이 꺼내지 못하는 말이 뭔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는 파트로나의 모습이 아까와 미세하게 달라진 것도 알아챘다. 파트로나의 얼굴이 흑주술을 풀기 전보다 조금 더 어려진 것이었다.
도채비족인 파트로나의 외모가 어려졌다는 것은 수명이 깎여나갔다는 의미였다. 요컨대 시스에게 걸려 있던 흑주술을 해소하는 것이 그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는 방증이었다.
“지금 시스는 어쩌고 있습니까?”
웅장한 무덤처럼 둥그렇고 녹색의 잔풀이 덮인 파트로나의 거처로 시선을 돌리며 라무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잠들었네. 한숨 푹 자고 나면 전처럼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할 거야. 그런데 문제는 워낙……. 하여튼 우선은 그녀가 깨기를 기다리세나.”
어린 꼬마의 모습을 한 늙은 도채비족은 콧잔등을 살짝 짜그리며 말하고는 인자한 눈빛으로 케노를 보았다.
“귀린의 아이를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우리와 너희는 예로부터 친척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지. 보아 하니 네 본모습은 명아주였구나.”
“명아주? 나는 지팡이였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현명한 사제님의 걸음을 부축하던 지팡이였어요.”
케노가 말투를 공손하게 바꾸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 시절에는 연세 많으신 훌륭한 사제에게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단다.”
조그마한 손으로 케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파트로나가 인자하게 미소했다. 케노가 외눈을 부드럽게 휘면서 고개를 주억주억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디 가시고 두 분만 마을에 남아 계십니까?”
일어서서 마을 전경을 휘둘러 살펴보던 라무스가 파트로나를 건너다보았다. 수많은 궁금증과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일하러들 갔지. 나는 무릎이 쑤셔서 쉬고 있었고, 이 녀석은 농땡이를 친 거고.”
파트로나가 비텍스의 머리에 가벼운 꿀밤을 먹였다.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어린 여자아이가 할머니뻘 되는 노인의 머리를 톡 때린 셈이었다.
“아이 참, 농땡이가 아니고요. 아침에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손님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그리고 이렇게 진짜로 왔고요.”
주름진 손으로 하얗게 센 은빛 머리를 문지르며 비텍스는 억울해 했다.
“소 뒷걸음치다 쥐잡기였겠지.”
뽀얗고 포동포동한 얼굴을 한 파트로나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일하러 가셨다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 겁니까?”
어릴수록 노인의 외모를, 늙을수록 아이의 외모를 가진다는 도채비족의 특질에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라무스가 물었다.
“저쪽 땅에, 그리고 바다에 나갔다네. 우리가 하는 일은 세상을 수선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인간들의 마을 가까이에 있는 화산을 안정시켜 폭발을 지연시키고, 전쟁이나 화재로 황폐해진 땅을 되살리고, 다친 동물들을 돌보고, 사라져가는 식물의 씨앗을 퍼뜨리기도 하고. 뭐 대강 그런 일들이야.”
“저쪽 땅에서 도채비족이 목격되지 않은 지가 아주 오래 됐는데요.”
그래서 도채비족은 멸족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도채비족의 존재마저 잊었다.
“이제는 우리가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철저히 존재를 숨기기 때문이지. 우리의 수 자체도 얼마 남지 않았고.”
파트로나의 말은 씁쓸하고 슬프게 들렸다. 그녀의 반응에서 라무스는 유추할 수 있었다. 먼 과거에 인간이 도채비족에게 위해를 가한 일이 있었으리라고.
“우리 일족은 인간과 맞서 싸울 수가 없어. 태생 자체가 그러하지. 그래서 공격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면 쉬이 소멸한다네.”
“우리가 남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하면 그 해가 고스란히 우리 몸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야. 그러니 우린 결국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 곳으로 숨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지.”
비텍스가 파트로나의 말을 거들어 설명했다.
라무스는 풀게트 관문에서 만났던 검은 기사와의 싸움이 생각났다. 환각인 동시에 라무스 자신이었던 검은 기사. 그 검은 기사에게 입힌 상처가 라무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던 현상. 말하자면 풀게트 관문에서 그는 도채비족의 치명적 약점을 체험한 것이다.
“태생적으로 그러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도채비족은 기원의 나무에서 비롯되거든. 자네, 기원의 나무라고 들어 보았나?”
파트로나가 라무스를 올려다보았다. 라무스는 어린 소녀의 귀여운 얼굴을 한 파트로나가 자신이 상상도 못할 만큼 나이가 많은 도채비족 원로라는 사실을 순간순간 잊어 버렸다가 다시 상기하곤 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수령이 오래된 기원의 나무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사람들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나무에게 기도를 했다더군요.”
“그렇다네. 기원의 나무에 올려지는 기도는 다 애틋하거나 간절하면서 선하고 옳은 것들이었어. 그 염원들이 오랜 세월 축적되고 응축되어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우리 도채비족이야. 우리는 기원의 나무를 매개로 만들어지지만 나무 그 자체는 아닌 거야. 나무의 정령과도 다른 존재고.”
“그래도 우리는 결국 나무로 돌아가. 우리 존재가 소멸하면 어린 묘목이 남아. 존재의 매개였던 기원의 나무와 같은 수종의 묘목 말이야.”
또 비텍스가 끼어들었다. 묘목의 잎사귀 같은 연둣빛 머리카락을 가진 늙은 도채비족은 노인의 외양을 가진 발랄하고 어린 동족의 참견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자 비텍스가 덧붙였다.
“꼭대기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집들이 있지? 그 집들은 빈 집들이야. 집의 주인들이 저 나무들이 된 거고.”
비텍스의 말을 듣고 마을을 다시 돌아본 라무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꼭대기에 나무가 없는 집 즉 도채비족이 살고 있는 집이 고작 열 채도 되지 않았다. 도채비족은 아직은 멸족하지 않았지만 멸족으로 가고 있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