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하고 선하기만 한 종족, 세상의 금가고 깨어진 부분을 돌보고 때로 사람들을 도와 온 도채비족이 영영 사라진다니. 라무스는 문득 쓸쓸해졌다.
도채비족이 멸족하는 날이 오면 막연하게라도 그들의 부재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그럴 것 같다. 그들이 없는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쯤은 서늘하고 삭막할 테니까. 자연과 생명에 대한 도채비족의 사랑과 헌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이 라무스.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생과 멸은 애초에 둘이 아닌 하나이니. 우리는 우리가 소멸을 향해 가는 것이 조금도 슬프거나 두렵지 않다네.”
작고 귀여운 꼬마의 목소리에 지혜의 말이 담겨 나왔다. 그러고 보니 파트로나의 얼굴은 어리지만 눈빛과 표정은 연로한 현자의 그것이었다. 라무스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비텍스를 바라보았다.
가장 어린 도채비족인 비텍스는 언젠가 외톨이가 될 것이다. 단 한 명 남은 도채비족으로서 묵묵히 주어진 운명을 살다 무덤처럼 생긴 자신의 집에 뿌리를 내린 어린 나무로 돌아갈 것이다. 비텍스가 기꺼이 그러할 것은 알지만, 이 단절된 곳에 혼자 남으면 외롭지 않을까?
비텍스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환하고 심오한 낯빛으로 눈을 찡긋했다. 인간들로서는 짐작도 못하겠지만 단연코 난 괜찮을 거란다. 이곳의 숲과 땅과 동물들과 새들이 다 나의 다정한 친구인 걸.
“아, 먹을 것을 좀 갖다 줄게. 여기까지 오느라 몹시 고단하고 지친 것 같은데.”
땋아 내린 은빛 머리를 팔랑이며 숲으로 들어간 비텍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딸기와 모루스 열매, 무화과와 같은 것들을 앞치마에 잔뜩 담아 왔다. 편평한 돌 위에 비텍스가 그것들을 부려 놓자 파트로나가 말했다.
“어서들 먹으렴.”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을 보자 잊었던 허기가 맹렬히 몰려왔다. 케노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고, 라무스는 그래도 아직 예의를 차릴 정신이 있어서 두 도채비족에게 함께 먹자고 권했다.
“우린 물과 햇빛이면 족해. 음식은 섭취하지 않아.”
비텍스가 손사래를 쳤다.
라무스와 케노가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을 양껏 먹어갈 무렵 파트로나의 거처 문이 열렸다. 모든 시선이 쏠린 문 뒤에서 시스가 나왔다. 제 발로 걸어서! 게다가 재잘재잘 말도 하면서!
“우와, 맛있겠다. 나 지금 배가 고파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야.”
늦잠이라도 자다 깬 사람처럼 커다랗게 기지개를 켠 시스가 구슬 같은 눈동자를 뒤룩대더니 과일 앞으로 구르듯이 뛰어 왔다. 케노와 라무스의 감격에 겨운 눈길이 시스에게로 모였다.
“시스…….”
케노는 울먹거렸다. 입가는 붉은빛과 자줏빛의 과즙으로 얼룩지고, 양 볼은 입안에 든 과일로 미어지고, 표정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호한 채로.
라무스는 감개무량한 반가움을 서둘러 눈에서 지워 버렸다. 냉철한 눈빛의 그가 긴 팔을 민첩하게 쭉 뻗었다. 과일을 한 움큼이나 쥐고 급하게 입으로 가져가던 시스의 주먹이 그의 손에 가로막혔다.
“잠깐. 소리 치고 뛰고 하는 거 보니 당장 굶어 죽진 않겠군. 그렇다면 흑주술을 풀어주신 고마운 분께 인사 정도는 하고 먹는 게 순서 아닌가?”
사실은 걱정도 됐다. 오랫동안 살아 있는 인형 상태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갑자기 과일 같은 걸 먹었다가 탈이 나는 건 아닌지. 그러나 라무스는 그런 속내를 철저하고 능숙하게 숨긴 채 놀리는 듯한 표정을 내보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
못마땅하게 라무스를 쳐다보던 시스가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과일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비텍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도채비족 할머니. 할머니께서 절 살려 주신 거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 제가 해드릴 일이 있을까요?”
비텍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아니야. 나는 할머니도 아니고. 인간으로 치면 난 너보다도 조금 어린 셈이라고.”
시스가 어리둥절하여 라무스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직 도채비족에 대해 잘 모르는 시스에게 비텍스는 머리가 새하얗게 세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일 뿐이었다. 라무스가 눈짓으로 파트로나를 가리켰다.
“그럼 날 구한 게 너구나? 예쁘게 생긴 꼬마?”
파트로나는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렸다. 케노가 기어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입 안에 있던 과일과 즙이 시스에게 튀었다.
“시스. 어리게 생긴 파트로나 님이 할머니고, 늙어 보이는 비텍스 님이 젊은이다.”
“그렇구나.”
케노의 설명을 들은 시스가 라무스를 쏘아보았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순서니 예의니 따지는 사람이 미리 말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라무스는 시스의 생각을 읽지 못한 척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트로나 님. 절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스는 파트로나 앞에 앉아 마음을 다해 공손히 인사했다. 살아 있는 인형 상태로 죽음에 한 발을 들였다 되살아난 시스는 자신의 삶이 그전보다 더욱 소중해졌다.
“난 그저 도채비족으로서 할 일을 한 거란다. 내 앞에 위급한 생명이 왔으니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지. 자, 배가 고플 테니 과일부터 먹으렴. 우리 숲의 먹을거리는 아주 순해서 탈이 없는 것들이니까.”
파트로나는 자신이 시스를 완전히 되살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시스가 꼭 알아야 할 일이었다. 시스가 과일을 먹고 좀 더 생기를 차리면 그때 말해줄 생각이었다. 잠시쯤은 되찾은 생을 기뻐하게 둬도 괜찮지 않을까.
케노와 장난을 치며 밝고 씩씩하게 과일을 먹는 시스를 보는 라무스의 심정도 착잡했다. 파트로나는 흑주술을 풀었다고만 했으니 흑주술의 유해한 여파가 아직 시스의 몸에 남아 있을 터였다.
결론적으로 파트로나가 시스에게 해준 일은, 흑주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에 더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었으리라고 라무스는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