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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그녀의 허세, 그의 고민

by 화진


파트로나는 묵묵히 시스를 지켜보다가 이윽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도채비족은 어떤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보면, 있는 그대로 말해준다네. 숨기지도, 더하지도, 빼지도, 바꾸지도 않지. 단 그 사람이 듣기를 원할 때만. 그러니 시스, 대답해 보렴. 내가 너에 대해 본 것들을 듣기를 원하느냐?”


시스는 먹기를 멈추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어린 소녀의 앳된 얼굴을 한 도채비족 노인의 보랏빛 눈동자에 시스의 모습이 명징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트로나의 양쪽 눈이 각각 비춰내는 모습이 같은 듯 달랐다.


한쪽은 몹시 어둡고 위태로워 보였고, 한쪽은 투명하고 슬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시스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어느 쪽도 그녀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다.


“예. 듣고 싶습니다.”


맑고 깊은 자수정 같은 눈이 왜 그런 식으로 자신을 비추는지 시스는 알아야 했다.


“시스. 너에게서 내가 본 것은. 배반의 고통, 상실의 아픔, 피를 토하는 절규, 복수의 맹세, 둘로 쪼개진 얼음 심장이었다.”


“예언 같은 건가요, 저에 대한?”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네가 자각하지 못하는, 의식 저편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일 수도 있고.”


“예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가혹해요. 차라리 전생의 기억이라고 치는 게 낫겠어요. 그럼, 지금 파트로나 님의 눈동자에 비친 두 가지의 제 모습은요?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런 게 보인단 말이냐? 뜻밖이구나. 내 눈동자에 맺혀 있는 상이 어떤 건지 나는 볼 수도 알 수도 없단다.”


파트로나의 말에 시스는 케노를 불렀다. 케노는 파트로나의 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더니.


“그냥 아주 깨끗하고 예쁜 눈동자다. 아무것도 비쳐 있지 않다.”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건 예언이 맞을 거야.”


페로를 안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비텍스가 신중하게 말했다. 페로는 웬일로 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자신을 얌전히 맡기고 있었다.


“비텍스 님도 보이나요? 파트로나 님의 눈에 비친 내 두 모습이?”


“아니, 안 보여. 그건 네가 파트로나 님의 눈을 거울삼아 스스로에게 보여주는 거니까 다른 이들은 못 보는 게 당연해. 양쪽에 다른 형상이 보이는 것 또한 있을 법한 현상이야. 미래라는 건 항상 두 갈래라고들 하잖아. 정해진 길, 만들어가는 길.”


“둘 다 낯설고, 전혀 원치 않는 모습인 걸요. 이게 예언이라면, 정해진 것과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 보이는 거라면, 적어도 한쪽은 아무런 근심 없이 편안한 모습이어야 해요.”


태생은 고아였고, 사랑을 베풀어준 양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양아버지는 시스를 버렸고, 레이디 앙켑세라의 집에 살면서부터는 스스로를 책임지느라 언제나 바쁘고 고단했다.


결코 녹록지 않은 시간을 견뎌오면서 시스가 꿈꾸었던 미래는 비교적 단순했다. 조용한 곳에 정착하여 느슨하고 태평하게 노닥거리는 인생. 단, 재담을 주고받을 친구 정도는 있어야겠지.


“예언은 결과론적인 말이라네. 가능성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 결과로 나타나면 신통한 예언이 되는 거야. 빗나간 예언은 잊히거나 예언이 아니었던 것이 되고. 그러니까 시스 네가 스스로에게 한 예언이라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 실현될 수도 있고 빗나갈 수도 있는.”


파트로나가 뽀얗게 어린 손으로 시스의 손등을 다독였다.


“그렇다면 저는 빗나간 예언을 하는 가짜 예언자가 되겠어요.”


시스는 단호했다. 파트로나의 눈동자에서 시스의 모습이 차츰 지워졌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런데 시스. 가장 중요한 얘기가 남았단다. 사실은 말이다. 흑주술은 풀었지만 네 생명을 온전히 소생시키지는 못했다. 애석하구나. 워낙 서툴면서 자제력 없이 구사한 흑주술이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에게 보름달을 열두 번 더 볼 수 있을 만큼의 수명을 나누어주는 것뿐이었다.”


“일 년…… 이라고요?”


멍하게 중얼거린 시스가 고개를 푹 떨궜다.


케노의 당황한 시선과 라무스의 숙연한 시선이 마주쳤다. 비텍스조차 예상치 못했다는 듯 낯빛이 어두워졌다. 페로는 슬픈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다가 낮게 흐느꼈다.


“일 년, 일 년이라. 완전히 끝인 줄 알았는데 일 년이나 더 살 수 있다니! 아직 한참 더 세상의 계절을, 계절마다의 풍경을, 맛있는 음식을, 흥미로운 책을, 우스운 농담을, 즐길 수 있다는 거잖아요. 다들 기운 좀 내요. 일 년이 다 돼갈 때쯤엔 어떨지 모르지만 일단 지금의 난 괜찮으니까.”


다시 고개를 든 시스의 얼굴에는 명랑한 빛이 돌아와 있었다.


허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라무스는 시스의 태도를 내심 지지했다. 살다 보면 허세라는 보호막이 다른 무엇보다 유용할 때가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보는 시스를 향해 익숙한 쓴웃음을 지었다.


시스는 노골적인 격려나 응원의 표정보다 라무스의 쓴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껏 대하던 대로 그녀를 대해주겠다는 뜻인 것 같아서.


라무스는 시스가 모르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남은 삶이 고작 일 년인 시스를 카푸로 데려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할지, 임무를 포기하고 그녀가 자유롭게 살도록 둬야 할지.


“얘는 불새로구나.”


파트로나가 비텍스에게서 페로를 데려갔다.


“예기치 못하게 미숙아로 부화한 데다 최근에 갑작스럽게 너무 큰 힘을 소진했어. 이 아이는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는 게 좋겠다. 두고 가렴. 우리가 잘 보살펴서 회복시킬 테니.”


시스 일행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페로는 거의 빈사 상태였다. 이대로 저쪽 땅으로 가면 불새로서의 능력은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 즉 기껏해야 덩치 큰 병아리보다 조금 나은 정도인 지금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페로는 격렬히 거부했다. 뀽뀽 울면서 파트로나의 손을 기어이 벗어나 데구르르 굴러서 시스에게로 갔다.


“페로. 네가 아프고 힘든 거 나는 싫어. 여기서 좀 지내다가 너의 이 지친 날개에 다시 힘이 솟으면 훨훨 날아서 나에게로 오면 되잖아. 알았지?”


알아들었다는 듯 페로가 울음을 그치고 시스에게 머리를 기댔다. 윤기 잃은 푸석한 깃털 하나가 소리 없이 천천히 땅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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