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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라무스의 의문

by 화진


‘이름이 페로였군.’


라무스는 고래 산맥에서 페로와 마주쳐 티격태격 우여곡절을 쌓으며 동행했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돌이켜 보니 꽤 즐거웠고. 마음으로 페로의 안녕과 쾌복을 빌면서 라무스가 페로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그러자 페로가 시선을 돌려 라무스를 쳐다보며 짧고 고운 소리를 냈다. 피리 소리를 닮은 불새의 노래. 그게 라무스에게는 마치 네가 바라는 대로 할 테니 안심하라는 의미로 들리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라무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자 페로도 똑같이 따라했다.


둘의 교감을 다들 신기해했는데 가장 놀란 사람은 당연히 시스였다. 시스는 페로의 반응이 정확히 라무스에게 향한다는 것과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시스는 정신의 감응으로 페로의 의사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페로, 뭐야? 너 왜 저 사람을 신경 써?’


시스가 페로의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페로가 아무리 시스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해도 한계는 있었다. 인간의 언어나 문자처럼 빈틈없는 세밀한 표현을 전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저 ‘그와 나는 가까운 사이.’라는 뉘앙스를 전하는 것이 페로의 최선이었다.


마뜩잖은 눈으로 라무스를 일별한 시스는 페로를 소중히 안고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러고는 비텍스에게로 다시 보냈다.


“케노.”


파트로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원한다면 너도 여기에서 지내도 된다.”


케노는 생각에 잠겼다.


저쪽 땅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외눈에 외다리에 몸의 색이 풀빛인 케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케노의 선량한 심성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마물로 단정하고 죽이려 들 것이다. 케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시스와 라무스에게 정이 들어서. 아니 처음부터 그들은 케노를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었으니까. 케노는 그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케노. 서운해 하지 말고 들어. 시스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네 마음은 알지만 넌 여기 남는 게 좋을 것 같다.”


냉철한 소리를 하는 라무스를 말끄러미 건너다보는 케노의 눈은 서글펐다.


“말리티아가 널 보고 기겁해서 마물이라고 불렀다고 했지? 모르긴 몰라도 저쪽 땅의 거의 모든 사람이 널 보면 그렇게 나올 텐데. 네가 힘도 세고 빠르긴 하지만 작정하고 널 해치려 드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야. 너와 같이 있으면 시스도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노릇이고…….”


이성적이고 옳은 말이지만 케노를 슬프게 하는 말이었기에 라무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시스의 의견도 자신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 거라 믿었다. 라무스는 시스를 향해 케노를 보호하고 싶으면 설득을 거들라는 눈치를 보냈다.


시스가 케노의 옆으로 가 앉아 손을 잡았다.


“끝내 네가 나와 함께 가겠다면 같이 가자. 하지만 난 네가 얼마 동안이라도 널 환대하고 존중해주는 이들 사이에서 지내는 경험을 해 보면 좋겠어. 저어, 파트로나 님?”


“말해 보렴.”


“만약 케노가 여기서 지내다가, 저쪽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지면, 돌려보내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그렇고말고.”


파트로나의 대답은 빠르고 산뜻했다.


그녀를 보던 라무스는 새로운 변화를 알아보았다. 파트로나의 외모가 아까보다 또 조금 어려졌음을. 혹시 비텍스도? 라무스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비텍스도 살짝 젊어져 있었다. 온통 희던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연두색 가닥이 섞이고 얼굴의 주름살이 줄었다.


도채비족의 겉모습은 나이와 반대니까 파트로나는 그새 노화했고 비텍스는 좀 더 성숙했다는 뜻이었다.


왜지? 우리 때문인가? 라무스가 파트로나에게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바로 그때.


“파트로나 님. 우리 때문인가요?”


시스의 목소리가 그를 앞질렀다.


“도채비족은 인간을 만나면 신체의 시간이 빨리 흐르게 되나요? 그래서 두 분의 모습이 변하고 있는 듯한데…… 역시 그런 거죠?”


파트로나와 비텍스는 너그러운 웃음만 지었다.


도채비족은 본디 청년기를 아주아주 길게 사는 종족이고, 어릴 때와 노인이 되었을 때는 인간과 흡사한 속도로 성장하거나 늙어간다. 그러나 인간의 숨에 노출되면 빠르게 나이를 먹게 된다. 불가피하게 인간에게 생기를 빼앗기는 것이다.


“시스, 당신만 괜찮다면 우리는 이만 돌아가자고.”


라무스가 풀밭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스가 더 머물겠다면 혼자라도 떠날 참이었다. 마침내 라무스는 결정을 보았다. 시스를 억지로 카푸로 데려가지는 않겠다고.


“그래. 그러자고. 케노는, 마음을 정했어?”


“정했다. 이곳에 있어 보겠다.”


케노는 자신의 첫 친구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이다. 시스를 보러 가겠다. 꼭 가겠다.”


마음속으로 ‘늦지 않게’라고 덧붙이면서 케노는 입을 꽉 다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울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너희들을 돌려보내 주마. 이쪽이야.”


파트로나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풀게트 관문의 정반대 방향, 그러니까 바다 쪽을 향해서. 라무스를 필두로 시스와 케노, 페로를 안은 비텍스도 파트로나를 따라나섰다.


“파트로나 님. 풀게트 관문에서의 일에 대해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파트로나를 바싹 따라잡은 라무스가 허리와 고개를 그녀에게 기울이고 거의 나지막한 소리로 운을 뗐다.


“말해 보거라.”


라무스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시스 무리는 진귀한 꽃들과 신기한 나무들을 구경하며 오느라 약간 떨어져 있었다.


“검은 기사 말입니다. 케노는 귀린의 아이니까 케노와 똑같은 검은 기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시스, 시스는 어째서입니까? 시스의 검은 기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풀게트 관문에서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그러나 살기에 찬 검은 기사를 만나게 되어 있는 게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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