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을 지고 허리를 살짝 앞으로 숙여 걷던 파트로나가 고개를 들어 라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비록 꼬마둥이의 해말간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이다. 따라서 귀여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게 표정은 원숙하고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 깊고 오묘하다.
“그녀에게 꼭 약속을 받도록 해. 라무스 자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일에 대해 반드시 보답하겠다는 약속 말이야.”
“그러자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네. 그녀에게는 다른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다른 피라고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며 라무스가 되물었다. 시스는 그리 멀지 않게 따라오며 비텍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쳤던 팔도 완전히 치유되었을 뿐더러 어느 때보다 활기 넘치는 낯빛으로 웃고 있었다. 살아갈 시한이 고작 일 년 정도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하여튼 희한하리만치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라무스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계할 필요 없네. 우리 얘기는 다른 이들에게 전혀 들리지 않을 테니.”
“다른 피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인간의 피와는 다르다는 거지. 그러니 자네가 그녀에게 베풀었던 목숨 건 친절에 대한 보답을 약속받는다는 건 곧 그녀를 한 건의 계약에 묶어 두는 의미라네. 언젠가 그 계약의 발효를 필요로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모호하고 실체 없는 말 같아서 라무스는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이 안 나왔다.
“어떤 다른 피인지는 파트로나 님께서도 모르시는 겁니까?”
“실은 그렇다네. 인간의 피와는 다른, 아주 순수한 피야. 요정이나 정령의 피가 아닌가 싶을 만큼 말이야.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티토니아에서 요정이나 정령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순혈의 마가 역시 자기 안의 어둠을 각성하기 전에는 피가 순수하다는 거야.”
라무스가 알기로는 순혈의 마가도 오래 전에 명맥이 끊겼다. 지금의 마가와 마구스 들은 기껏해야 혼혈의 자손이거나 피의 의식으로 만들어진 자들이었다. 라무스는 시스를 납치했던 말리티아가 그들 중 하나일 거라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마가는…… 아닐 겁니다.”
무심결에 시스를 변호하는 말이 나와 버려서 라무스 스스로도 놀랐다.
“그런가? 그래도 신중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그녀에게서 보은의 계약을 받아 둬.”
파트로나는 무언가를 조르는 진짜 아이처럼 라무스의 팔을 몇 번 잡아당겼다. 만에 하나 시스가 마가 쪽이라면, 그리하여 어둠의 힘을 각성한다면, 그 계약으로 한 번은 누군가를 구할 수도 있겠지.
“시스에게도 다른 피에 대해 알려줘야 할까요?”
아니면 그녀 자신은 이미 알고 있을까? 그럴 리는 없어. 라무스는 제풀에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시스에게서 내내 명징한 자기 확신을 보았는데, 그건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에게서 배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다. 그녀의 다른 피가 어느 쪽이든 결국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 올 테니까 말이야.”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침묵의 자리를 바람 소리와 새소리, 물소리 그리고 시스와 비텍스의 목소리가 채웠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들의 목소리는 새소리처럼 리듬감 있고 물소리처럼 낭랑했다.
꽤 오래 걸었는데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어느덧 코끝에서 소금기 어린 바다 내음이 살랑거렸다. 파트로나는 저쪽 땅에서 온 손님들을 조약돌 해변으로 안내했다.
“이거, 보석 아닌가요?”
조약돌은 파도에 연마되어 반들반들 광채가 나고 색이 고왔다. 시스가 다채로운 빛깔로 반짝이는 돌을 여러 개 집어서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도 섞여 있긴 하겠지. 왜? 가져가고 싶니?”
파트로나가 물었다.
“솔직히 욕심은 나요. 그런데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아요. 저쪽 땅에 가면 이것들이 평범한 돌로 변해 버릴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채로 시스는 돌들을 해변에 도로 뿌렸다. 파도가 밀고 온 새하얀 포말이 돌들을 씻었다.
그 모습을 보는 파트로나의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시스의 말은 사실에 근접했다.
번개 반도에는 아주 드물긴 해도 인간 손님이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 중 열에 여덟쯤은 이 바닷가의 조약돌 사이에서 보석을 골라 챙겼다.
보석은 그들이 번개 반도의 안개와 해무를 벗어나기 무섭게 물도 아니고 기름도 아닌 액체로 녹아 버렸다. 그들이 집까지 가져갈 수 있었던 건 주머니나 옷에 남은 색색의 얼룩뿐이었다.
“너희를 저쪽 땅으로 데려다 줄 친구를 불러야겠다.”
파트로나가 바다를 향해 ‘피스키볼라’라고 세 번 외쳤다. 곧 암청색의 거대한 그림자가 바닷속에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비텍스. 네가 나룻배로 두 사람을 피스키볼라에게 데려다 줘라. 이 늙은이는 노를 저을 힘이 없구나.”
“그럴게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해식굴에 나룻배가 있었다. 비텍스가 가서 나룻배를 바다로 밀어 띄우더니 노를 저어 해변 가까이로 왔다.
라무스와 시스는 케노와 페로의 눈물 젖은 배웅을 받으며 나룻배에 올랐다. 라무스와 시스가 서로 자신이 노를 젓겠다고 비텍스에게 노를 넘겨달라고 했지만 비텍스는 웃으며 거절했다. 나룻배는 밀려오는 파도를 미끄러지듯 타넘으며 바닷속 암청색 그림자를 향해 갔다.
암청색 그림자는 해수면으로 서서히 올라왔다.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등지느러미와 등의 일부만 바닷물 밖으로 드러났는데도 널찍했다.
“피스키볼라. 부탁드려요. 이 두 사람을 저쪽 땅에 데려다주세요.”
나룻배를 멈추고 비텍스가 깍듯하게 말을 건네자, 알았다는 대답인 듯 피스키볼라의 등지느러미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두 사람, 이제 저리로 건너가면 되는데. 별 것은 아니지만 주의 사항이 있어.”
비텍스가 푸른 바닷물 위로 살짝 올라와 있는 피스키볼라의 등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