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환각에 불과해. 라무스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검은 기사가 든 검의 파괴력은 실제였고 거기 실린 살의는 무시무시하리만치 생생했다. 낯설지 않은 살의였다. 라무스는 이 년여 전에 겔리키의 내전에 참전한 바 있었다. 영주인 하르몬의 두 아들인 렉툼과 투르피투의 후계 전쟁이었다.
라무스와 동료들은 장남인 렉툼의 편에서 싸웠다. 차남이자 서자인 투르피투는 페르베아투의 아바루스 왕으로부터 은밀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지원의 대가로 투르피투는 자신이 영주가 되면 겔리키 공국의 독립적 지위를 포기하고 페르베아투 왕국의 지배를 받겠다고 서약했다.
투르피투와 렉툼은 거의 동시에 녹스 용병단에 파병을 요청해 왔으나 녹스 성채는 렉툼을 선택했다. 렉툼이 제시한 보수가 투르피투가 제시한 것보다 낮았음에도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은 단주 파보르와 대장 네우테르가 정의와 명예를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겔리키의 후계 전쟁에서 라무스는 두 군대를 통틀어 가장 용맹했고 가장 많은 적을 베었다. 전투에 몰입해 닥치는 대로 적을 죽이던 라무스의 눈빛. 검은 기사는 바로 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광기와 살기로 가득찬 눈.
검은 기사의 공격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번번이 방어만 하던 라무스가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은 검은 기사의 검이 어깨를 살짝 스친 뒤부터였다.
망토가 깨끗하게 찢어지고 살이 긁혔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아서 피가 살짝 배어나는 정도였지만 라무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번에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라무스는 자기 자신과 생김새 뿐 아니라 검기마저 같은 검은 기사를 향해 검의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검은 기사는 뒤로 물러나고 물러나면서 라무스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냈다. 그러던 중 검은 기사와 라무스가 똑같이 비틀거리면서 물러섰다.
찔린 허벅지에서 피가 솟아 옷을 어둡게 적셨다. 라무스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상대의 허벅지를 찌른 것은 그였으나 창상은 양쪽에 똑같이 났다. 그래서 라무스는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 때문에.
이것이었구나. 풀게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까닭,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없는 까닭이. 라무스는 비로소 풀게트의 무서움이 체감되었다. 바로 자기 자신인 검은 기사를 만나기 때문이었다. 검은 기사에게 입히는 상해는 곧 자기 자신이 입는 상해였다.
검은 기사가 어떤 일이 있어도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또한 검은 기사가 라무스에게 입히는 부상은 검은 기사에게 영향이 없다. 그러니 이 싸움은 결국 라무스의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는 소모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괜찮나, 라무스?”
케노의 염려에 라무스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시스와 케노가 공포와 비탄에 젖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방법을 찾을게.”
그때였다. 검은 기사가 번개처럼 몸을 날려 케노와 시스에게로 돌진했다. 라무스도 펄쩍 뛰어올랐다. 수증기 자욱한 공중에서 쇳소리와 함께 자잘한 불꽃이 튀었다. 케노는 시스를 안은 채로 퍼뜩 뒤로 몸을 물려 기둥 모양의 검은 바위 뒤로 숨었다.
케노가 소리쳤다.
“라무스! 그의 이름을 알아내라. 이름을 알면 내가 가진 재주로 그를 다른 곳으로 유인할 수 있다.”
말리티아에게 썼던 방법을 쓰려는 것이었다.
“그건 불가능해, 케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게.”
라무스가 다시 검은 기사에게 공세를 퍼부어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면서 대답했다. 검은 기사의 이름은 결국 라무스니까 케노의 재주는 라무스까지 홀리게 될 터였다. 그 재주가 환각인 검은 기사에게 통할지 어떨지도 의문이었다.
검은 기사를 계속 몰아붙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 풀게트 관문 끝까지 이런 식으로 싸우면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인간인 라무스에게는 체력의 한계가 있다는 거였다. 환각인 검은 기사에게는 해당이 없는 약점.
라무스는 검을 쥔 자신과 생각하는 자신을 분리했다. 검을 쥔 그는 오직 생존 본능과 훈련된 기술 및 직관에 따라서 움직였다. 생각하는 그는 검은 기사를 향해 끊임없이 되뇌었다. 넌 내가 아니야. 넌 실체 없는 환각에 지나지 않아.
팔다리가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라무스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건 정신력이었다. 체력이 더 고갈되면 정신력조차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시점이 오고 말 터였다. 절체절명의 이 대결은 기어코 필멸에 이른다는 건가? 안 돼, 그럴 순 없어. 라무스는 이를 악물었다.
파보르는 말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번개 반도에 갈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아버지가 번개 반도를 떠날 때 도채비족이 맹세를 시켰다고. 번개 반도로 오고 간 경로에 대해 영원히 함구하겠다는 맹세, 어기는 즉시 돌이키지 못할 재앙을 입으리라는 맹세를.
파보르 단주님의 아버님도 이 길을 지났을까? 그렇다면 검은 기사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혹시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도 있을까?
공기가 더욱 뜨거워지고 매캐한 냄새가 확 짙어져 코를 찔렀다. 수증기 사이사이로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측화산들이 보였다. 라무스와 일행은 불의 산을 지나고 있었다.
검은 기사가 갑자기 빠르게 뒷걸음을 쳐 라무스와의 거리를 벌였다. 무슨 속셈인지 알 도리가 없는 라무스는 검을 고쳐 잡고 몸을 도사렸다. 검은 기사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품에 넣어 단검을 꺼내더니 라무스의 측면 뒤쪽의 측화산으로 던졌다.
“피해!”
시뻘겋게 타오르는 암석 조각들이 케노와 시스에게로 쏟아졌다. 라무스는 검은 기사에게 등을 내보이게 되는 걸 알면서도 그녀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은 기사가 라무스의 등을 향해 날린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예리했다.
케노와 시스를 감싸며 막아선 라무스에게로 불타는 돌들과 검은 기사의 검이 한꺼번에 쇄도해 왔다.